우리지역의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2> 강항 선생의 나포된 일본생활
우리지역의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2> 강항 선생의 나포된 일본생활
  • 광양뉴스
  • 승인 2016.04.22 20:12
  • 호수 6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래 시인, 수필가
조동래 시인, 수필가

강항 선생은 조선중기의 선비로서 맹자 정이니 강목 촌이니 하는 전설속의 천재로 병과급제(선조 27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직(閑職)에서 정유재란을 당하여 1598년 9월 영광앞바다 철산도 부근에서 이순신장군을 찾아가려다 포로가 돼 1600년 5월 19일 부산앞바다로 귀국할 때까지 2년간 일본에 억류된 신세였다.

그 환경에서 일본의 지도와 관직체계 등 우리에게 필요한 비서(秘書)를 조정의 선조에게 알려왔으며, 조선의 유학(儒學)을 일본에 전수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사서오경·곡례전경·소학·근사 록·통서·정몽 등 16종의 정주학과 조선의 과거제도·석전제례(釋奠祭禮)·향음주례 등을 후지와라 세카이와 마까마스히미치로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는「강항 휘초」라 불리는 수은 선생의 필사본이 16종 31책이나 되니 실상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국내에 알려졌고, 중국 한나라 소무·송나라 문천상의 충절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1900년 일본 에이매현 오오즈시에 홍유 강항 현창 비를 세웠고, 수은 선생을 일본 유학의 개조(開祖)인 등원서의 스승으로 받들어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까지 그들의 사상적 기초를 이룬 ‘和’ 사상을 수은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며 그의 현창비가 오오즈시에 있다는 것은 왕인박사 이후 가장 위대한 문화전도사임을 증명한다. 그들은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언어와 문자가 조잡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사중심사상이 오래도록 정책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큰 변화 없이 무사나 부유층 중심의 학문이 점차 시민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수은 강항 선생께서 후지와라 세이까·아까마스 히미치로 등에게 조선의 유학(儒學)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그 후 120년이나 지나 우리나라의 서원과 비슷한 데라코야(寺子屋, 書堂)가 8백여 개나 생겨났다.

그들은 당시 호신과 호국의 정신문화는 사무라이를 숭상한 까닭에 거의가 경전(經典)에 문외한이며 승려가 학문을 전수하는 계층으로 발전하여 임제종, 선거 5종, 전도 진종, 법화종 등의 승려들이 지식전도의 임무를 전담했으며 웅인의 난 이후 군웅활거시대가 더욱 심화 되었다.

우리나라는 효종 연간에 전국적으로 1300여개소의 서원이 설치되었으나 고종 때 정쟁과 비생산적 요소가 많다는 이유로 거의 강제로 훼철 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1641년에 하나바타게 교장이라는 학교를 세운 다음 서원이 학교형태로 바뀌어 240여개나 되었다.

에도막부시대에는 행정단위인 번 단위로 지방분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평온을 유지했으나 아이쯔와 사쓰마번이 협력하여 존왕이 파를 물리치고 명치유신시대에 접어들기 까지 일본 유학의 주류인 (和)의 사상은 수은 강항선생이 전한 중용의 사상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1980년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주제곡‘간양록’은 가수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했던 대중가요였다. 노래의 제목은 수은 강항선생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고향 땅을 그리며 쓴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2002년 2월 오오즈시에서 친선교류를 목적으로 영광군청 사람들을 초청했던 것이다. 두 지역이 인연을 맺은 것은 영광 출신 강항선생 때문이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시민회관 앞에“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있고 옆에는 선생을 소개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일본성리학의 아버지라고’써져있으니 선생을 추모하는 뜻이 분명하다. 또한 선생의 이름이 일본 초등학교 교재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쓰네오는 강항선생이 일본에 수준 높은 학문을 전수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방법이든 선생을 일본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또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어 10여 연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강항연구회원들의 연구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선생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답사해 유적지로 발굴해 가고 있다.

강항선생이 지났던 하지 천에는 나무표지판을 세워 인영이 있는 땅이란 표시를 해 두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