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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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17.04.07 17:31
  • 호수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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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에 사는 행복
유미경 한국문인협회 광양지부 사무국장

처음 광양 땅을 밟았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에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신 벚꽃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낯설고 두렵고, 원인모를 불안감들이 엄습했던 그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들. 그 때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온 광양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이방의 거리였다.

 그렇게 시작된 광양에서의 삶은 무의미함 그 자체였다. 부모형제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15년이 넘도록 몸담고 있었던 문학의 길도 광양에 오면서 다 접어야 했던 나는 그 상실감에서 빚어지는 우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부딪치는 일들은 내성적인 나의 말문을 닫아버리게까지 만들었다. 그 속에서 나는 외부와 단절 된 채 외롭고 쓸쓸하게 지냈다. 누가 나를 막은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움츠려들었다.

나는 광양이 폐쇄된 곳이라 생각했다. 텃세가 세서 타지방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는 곳이라 여겼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 속에 빗장 하나를 단단히 걸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조금씩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그 손들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는 그들을 따라 봉사활동을 다니고, 문학에 다시 발을 들여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17년을 살면서 뒤를 돌아보니 나는 어느 새 광양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광양은 폐쇄된 곳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 것뿐이라고. 외롭고 쓸쓸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마음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라고.

광양에 온 지 열일곱 번째 맞는 4월, 눈부신 벚꽃이 지천으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올 해는 그 벚꽃이 유난히도 아름답고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보름이 지나면 친정 부모님께서 광양으로 이사를 오신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나는 우리 집과 걸어서 오 분 거리인 곳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수리를 하고 있다. 비록 포항 집보다는 작지만 두 분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요즘 나는 생각이 많다. 그것들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두근거리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부모님께서 광양으로 오시면 그동안 못다 누린 것들을 하나씩 해드리고 싶다. 아버지와 함께 시장도 가고 새로 생긴 단지안의 쇼핑센터에서 영화도 보고, 백마고지 전투 이야기도 밤 새워 들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름 방학 때 세계문학 전집을 사 주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집에서 포항 시내로 나가려면 한 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버스에서 내려 3시간이나 넘게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책을 사 주셨다. 그 때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 오듯 쏟아지던 땀방울들이 어제 본 듯 선연하게 떠오른다. 90이 된 나이에도 신문의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읽고 가계부를 쓰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문학적 감각을 얻은 것이 모두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와의 추억도 많이 쌓을 것이다. 걸음을 걸을 수 없어서 집안에만 계시는 어머니를 어떻게 하든 지 밖으로 모시고 나와 아름다운 광양의 자연을 보여드리고 싶다. 내가 아무리 어머니를 위해 마음을 다하려고 노력을 해도 그 백분의 일도 다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중학교에 다닐 때 전기도 없고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어머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솔가지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 주셨다. 내가 졸리는 눈을 비비며 먹기 싫다고 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숟가락에 밥을 떠서 한 숟가락만 더, 한 숟가락만 더 하시면서 밥 한 공기를 다 먹게 했다. 그런 어머니 덕에 나는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졸업 할 때는 3년 개근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어머니를 그렇게 돌봐야 할 상황이 되었다. 포항에 한 번씩 갈 때마다 맛이 없다며 한두 술 밖에 안 드시는 어머니께, 한 숟가락만 더, 한 숟가락만 더 하고 어머니 입에 밥을 넣어드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14살의 중학생이던 내 모습과 마흔한 살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참으로 곱고 단아한 어머니는 평생을 가정과 자식을 위해서만 살아 오셨다. 일 년에 열 번이나 되는 제사 날짜와 가족들의 생일을 잊은 적이 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백발과 주름이 가득 찬 얼굴에, 당신의 나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셨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난다.

나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베이비 붐 세대이다. 전통세대와 386세대에 끼여 희생만 당했던 세대. 부모한테 많은 것을 받지도 못했지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자식한테 모든 것을 바치고 버림받는 불쌍한 세대, 돈이 없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공장 근로자로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던 세대-물론 객관적으로는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어른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어 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할 존재들이다. 자식 또한 마찬가지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낳고 키운 것은 그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식이 자라면서 받은 수많은 기쁨과 행복이 바로 그 수고에 대한 대가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만 믿고 광양에 오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자식들한테 아직까지 못 다 준 사랑을 주는 것이다.

이제 두 번의 일요일이 더 지나가면 부모님께서 광양으로 오신다. 나는 부모님께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고 이제야 조심스럽게 내미는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드리고 싶다. 고향을 떠나 광양에 온 것이 정말 잘 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