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몽골여적(旅跡)-귀여운 소매치기
<기고> 몽골여적(旅跡)-귀여운 소매치기
  • 광양뉴스
  • 승인 2018.11.23 19:27
  • 호수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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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만 어르신기자
오학만 어르신기자

2005년에 몽골에 들어갔다. 그때는 길가에 이동 공중전화가 있는가 하면 저울을 길가에 놓고 행인들의 몸무게를 달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돈으로 30원 정도를 받았다. 누가 길거리에서 자기 몸무게를 달아보랴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심심찮게 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처럼 유명한 커피숍이 많아졌지만 그 당시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면 뜨거운 물 한 컵과 봉지 커피 한 봉지를 주었다.

하루에 15만명 정도가 드나드는 몽골 최대의 시장(나란톨 시장)에서 일단의 한국관광객이 카메라를 소매치기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카메라 끈을 손목에 끼고 카메라가 달랑거리도록 들고 다녔단다. 붐비는 시장에서 그걸 가져가기는 아주 쉬웠을 것이다. 말이 15만이지 몽골 인구의 5%(당시 몽골 인구 280만명)가 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온통 눈으로 덮인 새벽 6시에 출근하다가 세 청년에게 배낭을 빼앗긴 적이 있다. 빼앗기고 나서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게 외쳤다.“어이! 그 안에 돈 없어!”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유유히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내 상식으로는 여느 도둑 같았으면 세 명이니까 둘은 나를 때리거나 붙잡고 한 명이 배낭을 벗겨 가면 쉬울 텐데 그 친구들은 셋이서 반항하는 나를 때리거나 붙잡지 않고 배낭만 벗기려 애를 썼다.

한 번은 택시요금으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전국대학생 한자 경시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탄 택시가 3만원을 달라고 했다.

갈 때 4500원을 주고 갔는데 왜 이리 돈을 많이 달라고 하느냐고 따지니 방긋하며 웃더니“이 차는 좋은 차라서 좀 비쌉니다!”어이가 없었지만 지불하고 돌아섰다. 버스정류장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몽골 최대의 시장‘나란톨’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역시 사람들로 많이 붐비는 사이를 지나면서 뭔가와 강하게 스침을 감지하면서 감각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10여 미터 앞에서 두 청년이 주변을 흘낏 거리며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 소매치기임을 직감하고 빠르게 쫓아갔다.

사람이 많아서 멀리는 달아나지 못했다. 소리쳤다.“서라! 지금 경찰이 오고 있어!”그러자 한 청년이 머뭇거리더니 앞서가는 또 다른 청년을 불러 세웠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향해 계속 뛰었다. 앞서 가던 청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도망을 멈춘 그들은 전화기를 내게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한 번은 퇴근 시간에 앞서 말한 시장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건장한 청년 한 사람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얼마가 지나서 왼쪽 가슴에 뭔가 접촉하는 느낌에 가슴 쪽을 바라봤다. 커다란 손이 내 윗옷 주머니 속에 들어와 뭔가를 만지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 손의 임자를 올려다보았다.

내 상식으로는 소매치기 하다가 발각 되었으면 나를 밀치든지 하고 줄행랑을 쳐야 맞는데 그 사람은 즐거운 모습으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격으로 보아 내가 당해낼 수 없는 사람이어서 나도 그냥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그때 그곳에서는 외국인이 그런 사건 사고에 노출 되었을 때 신고해도 시원하게 해결 되는 일이 드물었다. 물론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만났던 몽골의 소매치기는 비록 물질이 없어 남의 물건을 손대는 생계형 소매치기였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못하는 순박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장난이 좀 심했던 귀여운 소매치기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