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김장
<살아가며> 김장
  • 광양뉴스
  • 승인 2018.12.07 18:28
  • 호수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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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희 시민기자

올해 초여름까지는 날이 많이 가물었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지자 텃밭에 삼각대모양의 스프링쿨러까지 세워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물을 줬다.

시골집에서 가족들 모두의 김장을 한꺼번에 했던 지난해, 우리는 너무 힘드니 올해부터는 각자 알아서 자기 집에서 김장을 하기로 했노라며 두 분 다 몸도 불편하신데 텃밭을 가꿀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아버지는 땅을 고르고 비닐을 씌우더니 기어이 배추를 150포기나 심곤 여름 내내 공을 들이셨다. 배추가 얼마나 크게 잘 자랐던지...

결국 아버지가 심어놓은 배추를, 무를, 파를, 갓을 뽑아 김장준비를 했다. 아직 덜 자란 몇 포기는 쌈 싸먹게 두고 큰놈으로만 뽑았는데도 머리통만한 배추가 120포기가 넘는다. 워낙 커 두 쪽으로 잘라 절이고 씻는데 만도 이틀이 걸렸다.

허리를 펴는데 옛날 우리 뒷집에 사시던 살구댁 할머니의 포즈가 나온다. 장을 보고 읍내에서 오실 때면 머리에 커다란 보자기를 이고 허리와 두 팔을 있는 힘껏 뒤로 젖혀 걸으시던 그 자세가 왜 나오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감나무 밑에 파는 또 얼마나 많이 심으셨던지, 참 부지런도 하시다. 우린 파김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파김치 잘 먹는 작은 형부 때문에 파를 이렇게 많이 심은 거라며, 그 파를 다 깔 때까지 반나절 이상을 형부는 느닷없이‘죄인’이 되었고, 마늘에 양파와 생강까지 깐 언니와 동생은 정말 눈에서 눈물이 절로 났단다.

무는 또 어떤가. 땅을 파서 얼마는 묻었어도 아직도 한 가득이다. 무청은 잘라 그늘에 뒤집어 널었다. 겨우내 시래기국을 끓여먹고도 남을 양이다. 올해는 무가 다 맛있는 건지 먹어보니 달디 달다. 채 썰면서 몇 개를 집어 먹었다.

사과랑 배들을 넣고 믹서기에 간 양념에, 눈물의 파와 솜털 같은 가시가 살아있는 갓을 채 썰어 넣고, 마지막으로 썰기 좋게 살짝 얼린 청각까지 송송 썰어 넣고 버무리는데 잘 끓인 육수 때문인지 젓갈 때문인지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난다. 120포기의 양념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뒤적거리는 게 만만치 않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옆에서는 양념 간을 보느라 배추 반포기를 거의 다 먹었다.

잘 된 양념에 절인 배추를 버무리는 건 그나마 재미지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배추를 치대면서 다리 한쪽을 접었다가 폈다가, 몸을 이리 비틀었다 저리 비틀었다하면서“아이고 허리야”소리가 절로 나는데도 누구 입에서 먼저 시작 된지도 모르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다보면 뭐가 그렇게 웃겨서 깔깔거리게 되는지.... 기억 저편 너머 어슴푸레 남아있던 추억 속 사건들은 서로 뒤엉킨 채‘내 얘기가 맞네, 네 얘기가 맞네’로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가 또 배꼽을 잡는다.

엄마 손잡고 달리기 하던 운동회 얘기며, 소풍얘기, 장농 속에 숨겨 놓고 몰래 먹었던 사과얘기. 맞아 맞아...옛날에 그랬었지.

“배추 얼마나 남았어?”

“아직 멀었어. 이제 3분의 1가량 밖에 안했는디 뭘 벌써 물어봐. 아직도 당당 멀었는디”

 “아니여, 양념이 부족할까봐 그라제”

 정말로 양념이 부족할까봐 물어보긴 했으나, 아직도 절반도 안했다고? 이런...

얼굴은 기본이고 바지에, 발바닥까지 빨간 양념을 묻히고서야 끝이 났다. 덜 절여진 배추들을 따로 빼놓았다가 양념을 좀 더 넣고, 잘 볶아진 깨를 듬뿍 넣고 김치를 쫙쫙 찢어가며 버무렸다.

둥그런 상에 빙 둘러앉아 빨갛게 잘 버무린 김장에 돌돌 말아 먹는 수육은 그야말로 김장의 백미다. 특히나 솜씨 좋은 언니가 만드는 수육은 정말 부드럽고 윤기가 좔좔 흐른다. 딱 한잔만 하겠다는 막걸리는 금방 동이 난다. 참 행복한 밥상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젠 1년 내내 사시사철 아무 때나 배추를 살 수가 있고, 잘 포장된 상태로 판매되는 김치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누군 굳이 김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배추가 제일 맛있을 때 담은 김장김치만큼 맛있는 김치는 없는 것 같다. 김장을 포기 못하는 것이 꼭 이 김치 맛 때문이겠는가? 김치 통에 김치를 그득 담아 집에 가지고 오는데 세상 부자가 된 느낌이다.

후유증은 컸다. 한 이틀 근육통으로 드러누웠다가 일어났다.

나뭇잎이 바람에 다 떨어지고 비마저 내린다. 겨울비다. 겨울비 한 번에 내복이 한 벌이라고, 비 그치고 나니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김장을 하고 나니 걱정도 없다 하며 한가로이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추워지는 겨울, 자식을 위해 아직도 헌신적인 아버지, 그 아버지는 김장으로 1년 농사를 마무리하시고 또 그렇게 부쩍 나이가 들어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