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한 개
<고전칼럼>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한 개
  • 광양뉴스
  • 승인 2019.01.31 16:24
  • 호수 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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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 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아무것도 아닌 아주 하찮은 일을 말한다. 획수가 적은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고사다. 그러나 속뜻은 너무 아픈 뜻이 담겨있는 말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태사령이란 직책을 가진 대대로 사관집안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이란 역사가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譚)도 무제를 모시고 유학의 법통과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중국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하지만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한 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아들 사마천 에게 자기가 이루지 못한 사기(史記)의 완성을 간곡히 부탁하는 유언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사마천은 그때부터 선친의 유지(維持)를 받들기 위하여 저술에 착수 했다.

그 후 많은 사료들을 모으고 일이 잘 진행되는 가운데 7년 즈음 큰 재앙이 찾아온다. 당시 무제는 가장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李廣利)에게 흉노 정벌의 전공을 세워주기 위해 명장인 이릉(李陵)에게 보급을 맡아 이광리의 후방을 돕도록 명했다.

그런데 이릉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흉노 깊숙이 들어가 별동대 5천의 기병을 통솔하면서 독자적으로 흉노와 싸웠다. 이릉은 겨우 5천의 군사였지만 흉노 선우의 군대 3만과 접전을 벌여 수천의 군사를 사살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흉노 선우는 현왕의 군사 8만을 지원받아 도합 11만의 군사와 싸우는데 처음에는 20배의 군사에게도 밀리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흉노의 선우는 공격을 멈춘 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철군을 명령했다.

그런 가운데 이릉의 부하하나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면치 못하게 되자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해서 현재 이릉 병사들의 약점을 알려준다.

화살도 떨어지고 군량도 다 되어가는 사실을 안 흉노는 철군하려던 말머리를 돌려 대대적인 기습작전을 감행한다. 이릉군은 퇴로도 없고 원병도 오지 않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항복하기에 이른다.

부하들은 대부분 전사하고 400여명만 살아서 한나라로 돌아갔으며 이릉을 흉노에 붙잡혀 항복한다.

흉노 선우는 이릉을 적이라도 용감했던 것을 칭찬하며 자기의 딸을 아내로 주며 후대 하였다. 한편 무제는 이 일로인하여 이릉의 노모를 주살했으며, 이릉의 죄를 묻는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성토하기에 이른다. 어느 누구도 이릉에 대해 변호해 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릉과 친분도 별로 없는 사마천이 무제의 화를 누그러뜨려 주기위해 이릉의 과거 전공과 인품을 들어 그의 투항에 대해 변호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무제의 분노를 부채질 하는 꼴이 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죄목은 없는 사실을 꾸며 황제를 모독한 다는 죄로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사마천은 사형(死刑)을 당하는 것, 다음에 속전 50만 냥을 내고 풀려나는 것, 다음에 궁형(宮刑)을 당하는 방법 이 셋 중에서 선택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마천은 고심 끝에 궁형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이면 대부분 사형을 택한다. 궁형을 선택해도 형 집행 뒤 살아남을 확률이 4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치욕적인 궁형을 선택 했던 것이다. 이 당시 47세였던 사마천은 같은 처지의 친구인 임안에게 유명한 명문의 편지를 쓴다.

「저의 선치께서는 부부나 단서를 가질만한 공로가 없었습니다. 천문, 태사, 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 하였는데 점치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일은 본래 천자께서 장난삼아 노시던 것으로 광대를 양성하시는 것 같아 본래 세상 사람들이 가볍게 봅니다. 만약 내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九牛一毛)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에 죽음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저에게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지혜가 모자라 죄가 극에 달해 마침내 스스로 죽음에 나가 면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마천은 그로부터 더욱 발분하여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치욕을 참고 몸을 굽힌 자신의 삶과 영혼이 투영된 글을 써 내려갔다. 무제도 나중에는 사마천의 충성심을 인정하고 다시 중서령에 임명하였다.

그 후 55세 되던 해에 저술에 착수한지 18년 만에 불후(不朽)의 명작 사기를 완성하는데 526,500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사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물중심으로 사건을 망라한 기전체(紀傳體)를 선택했다.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고사이지만 얼마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