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유서 깊은 감호정
[기고] 유서 깊은 감호정
  • 광양뉴스
  • 승인 2019.04.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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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향교 옥곡지회 안영신 행정사

호남의 명산 백운산 자락에 500리를 도도히 굽어 흐르는 수려한 섬진강과 그 건너편 위로는 구례 토지면과 아래로는 하동 화개면이 한눈에 펼쳐 보이는 이곳 다압면 염창마을에 거주하시던 선비 김지섭 공(金之攝,1798-1863) 1839(기해)년에 본 마을의 누추함을 씻고 후학을 양성키 위해 한적한 마을 뒷산에다‘감호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한다.

그가 지은‘감호정(鑑湖亭)’란 현판을 음미해보면 글자 그대로‘거울에 비친 호수처럼’주위의 빼어난 경관이 그의 정결한 이미지가 묻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는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선비들과 교류를 하고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시인묵객들의 공간으로 이용코자한 이 정자가 20년을 넘게 사용하다보니 낡고 헐었음에도 후학들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지섭 公의 아들(달진)이 재차 1860.8.25 상량해 높고 크게 중건하였는데 그때 지섭 公의 손자인 응란 公(: 만희 1849-1924)이 어렸지만 상량문 기록을 똑똑히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은 지 또 약 40년이란 세월을 지나다보니 헐고 낡아 기우는 것을 손자인 응란 公이 54세가 되어 세 번째 상량을 해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신축년도가 기해년에 지은 집이 재차를 거쳐 3차 중건을 한 것이 우연찮게도 한 갑자(60)가 지난 기해(1899)년이다 보니 어찌 한 갑자를 맞추어서 지은 것 마냥 기특하다 하였다.

또한 상량월일이 2차 월일(1860.8.25.) 3차 월일(1899. 8. 25.)이 일치된 것에 응란 공이 기이하다는 기록을 그 이듬해에 매천선생에게 중건기문을 부탁해 지은 기문에 나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1924년도에 발간돼 광양군지(감호정 중건기)에 기록돼 있다.

네 번째 중건은 응란 공(김해김씨 측은공파)이 두 아들 형제에게 얘기해 세운 것으로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종손(정열)을 비롯 종중에서 보수를 통해 내려 온 것이 현재의 건물이라 했다.

그리고 김지섭 공의 손자인 응란 공이 지은 감호정광제사아문(鑑湖亭光霽社雅文 1942, 원광대 도서관 소장)에“시의 모임이 울림으로 존재하고 시가 있음으로 해 모임이 있는 것임”을 말한다면서 백운산 아래 위치한 감호정을 중심으로 광제사가 결성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로 인해 1900년도 전후 매천선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인 묵객들이 찾아 들어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한 폭 그림과 같은 깨끗한 섬진강의 자연 풍경을 벗 삼아 백일장을 비롯 시문을 읊고 주고받으며 당시 저마다 선비들이 고을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광양을 비롯 하동, 남해, 사천, 순천, 구례, 곡성, 보성, 남원에 이르기까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리 지역에 정신적 지주로 수많은 선비들이 오갔다는 흔적들을 보면 조선500년의 마지막 선비 매천황현이 1900년에 지은 중건기(記文)가 정자를 지키고, 한말의 향리선비 지산 소진덕. 경암 김교준. 숙릉참봉 주화섭 등이 자리매김해 시문을 남겨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신학(新學)으로는 이 지역 인사들인 정인섭(鄭寅燮), 유치용(兪致龍), 강주순(姜周淳) 등 세 분이 학교 문을 여는데, 우리 광양시에서는 그때 그 학교가 최초의 학교로서 다압동광학교(1907.3.5.).

광양서교(1907.9. 사립 희양학교, 박희권)보다 6개월 먼저 문을 열었다.

지금은 시민의 휴양소(메아리)로 사용하고 있지만 유서가 깊은 곳으로 이곳역시 감호정의 정기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감호정이 지은 지가 올해가 100년이며 우리 광양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정자인 바 향토문화재로 등록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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