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진월면 진목길 69-3에는 오랜 세월 마을과 함께해 온 순흥안씨 고택인 운강장이 있다.
고택 운강장(雲岡莊)이란 안봉호공(1898.3-1988.3)의‘운강’이란 호(號)와 재실(齋室) 명이다. 집터는 1000평이 넘는 대지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래등 같은 굵은 기와집이 여덟 동이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에 얘기에 의하면 옛날에“이 마을을 지나가는 손(客)들이 이 집을 보고 이 동네는 웬 동네 한가운데 큰절이 있나”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올 만큼 대단한 집이라 했다.
문간채 문중방 위에 걸려있는 현판은 검정바탕에 하얀 글씨로‘운강장’이라는 함지휘호가 보이는데 이는 당시 요순시절 태평연월로 세(勢)를 뜻함이며, 지금은 문전성시를 이뤘던 그 영화로움은 어딘가 간데없고 세월의 풍화로 인한 고풍스러움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끌고 있다.
현재 이집에 거주하고 있는 종손(운강의 아들:정주-미국에서 정년하고 고향에 온 지 얼마 안됨)은 남은 2동이라도 향토문화재로 등록되기를 바라고 있다.
건물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인 1870년경으로 추정 되는데 지리산에서 벌송을 뗏목으로 이동해 바닷물에 절여 집을 지었기에 지금도 벌레 먹은 데가 없다.
당시 집을 지을 때 수목수 한사람이 도리 기둥 하나를 깎는데 열흘이고 서까래 하나 깎는데 일주일인데 서까래 하나를 4-5일에 걸쳐서 깎은 사람은 아무리 잘 깎아도 부실하게 깎았다하여 품을 주고 돌려보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꼼꼼히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강공의 집안 직계을 들여다보면 광양군지(1983, 914P)에 따르면 조선 519년에 걸쳐 광양출신 문과급제자가 8명이 나오는데 그 중 한사람이 운강(안봉호) 공의 증조부 안창범(1835-1888)이다.
그는 고종13년(1875)에 세자책례문과(5명 등과)에 급제해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을 지낸 바 있고, 그 아들 윤석(운강의 조부) 공은 통덕랑을 지냈다.
또한 그 손자(운강의 부) 안경준(1875-1946) 공은 진월면 집강 초대면장(1910-1914)과 광양향교 4대 전교를 지냈고, 진월초등학교 설립(1926) 시 설립위원회에서 토지 희사를 권하자 논 20마지기를 선뜻 기부했으며, 운강공(1889-1985)은 일본 와세다 대학(법학과)을 졸업하고 공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서울시장을 지냈던 윤치영 씨(1998-1996)와 와세다 대학 동기며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 씨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한다.
윤치영 시장이 1966년 서울시장 재직 시 서울치안감을 좀 맡아달라는 했는데 안나갔다고 전해진다.
한번은 운강공이“서울을 갈테니 자네가 서울역으로 나오소”하고 서울역에 가니 윤치영 시장이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을 보고, 운강공이“어이 이 사람아! 촌사람같이 웬 빨간 넥타이”야 하니 윤 시장이 “촌사람은 자네가 아닌가!”라는 얘기와 그는 평생 동안 달걀하나 값을 못 벌어봤다는 에피소드와 같이 고택에 살았다는 인사로 생각되며 필자 역시 본 운강장을 향토문화재로 등록을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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