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감’
[기고] ‘감’
  • 광양뉴스
  • 승인 2019.10.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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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도 덥다고 에어컨을 틀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더니 하늘이 저만큼 높아졌다. 가을이다. 오랜만에 시골집에 들렀다. 얼마 전 지나간 태풍 때문인지 감나무 밑에 감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우리 집 그 넓은 텃밭에는 처음엔 감나무가 없었다. 마늘을 심고, 고구마를 심고, 그리고 콩이랑 상추, 부추는 심었어도 시골 그 넓은 집 텃밭에 감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우린 옆집 순아네 마당에 있는 아주 큰 감나무에서 날아와 떨어진 감꽃을 주워서 실에 끼워 목에 걸고 다니면서 아껴서 먹기도 하고, 돌담을 넘어온 종남이네 감나무 가지를 몰래 몰래 당겨서 담 안쪽으로 떨어진 떫은 땡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 맛이 사라지면 맛있게 먹었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이면 바람에 떨어진 땡감을 주우러 장대비를 좍좍 맞으면서도 두 할매만 사는 큰 기와집 담 밑으로 갔다. 그 집을 지키는 개는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금방이라도 줄을 끊고 대문으로 뛰쳐나올 것 만 같아 얼마 줍지도 못하고 컹컹 짓는 소리에 혼비백산 도망쳐왔다. 감이 익으면 우리 몫으로 오는 감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감인데 얄미운 까치는 꼭대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홍시를 쪼아 먹고 있었다.

“왜 우리는 감나무가 없어? 동네에서 감나무 없는 집은 우리밖에 없어. 다른 집은 두 그루, 세 그루, 네 그루도 있는데 왜 우리집에만 감나무가 없어. 왜 없어?”

어느 날 엄마가 감나무 묘목을 열다섯 그루를 사오셨다. 5년이나 7년 후면 감이 열린다고 했다. 이미 마늘로 꽉 찬 밭이지만 빈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것저것 채소를 심던 아버지는 귀한 감나무 곁에는 아무것도 심지 않으셨다. 밭 메다가도 다칠까봐 노심초사했고 겨울이면 짚으로 몇 번씩 꽁꽁 둘러싸서 얼어 죽지 말라고 공을 들였다.

이삼년 후 얼마 자라지도 않은 감나무에서 꽃이 피자, 우리는 얼마나 열광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해도 그 다음해도 우린 그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도 친구들이랑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삼팔선놀이를 하느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야 집에 들어가던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하느라 컴컴한 밤에 집엘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고, 그사이 큰 언니가 객지에 나갔고 작은언니가 졸업을 했다.

몇 그루의 감나무가 죽은 듯 하고, 또 몇 그루의 감나무가 아무것도 모르는 이웃 아재의 가 쟁기질에 뽑혀나갔다.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난 감나무는 오롯이 아버지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살아남은 감나무를 뽑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밭 가장자리 돌담 밑으로 옮겨 심으셨다.

“아부지, 감나무를 옮겨 심으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무렵이면 얼마의 감을 따먹긴 했을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그리 없다.

언니들이 결혼을 했다. 나도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왔고 동생들도 학교 때문에 다들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골집에는 부모님 두 분만 남았다. 그 무렵인 듯하다. 우리집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게... 아버지는 지극정성으로 감나무를 돌보셨고, 살아남은 여섯 그루의 단감나무와 한 그루 대봉나무에 열린 감은 그 개수를 셀 수가 없었다.

감이 익어 가면 아버지는 노심초사하셨다. 저 감을 따서 자식들한테, 손주들한테 보내야한다. 감이 익어간다. 감이 익어간다...

“이번주에 내려오니라. 감 따야 한다”

일곱 그루에서 나온 감을 뒷마당에 부으면 한 가득이다. 꼭지를 잘 다듬고 윤기 나게 닦아서 사과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포장을 한다. 이건 모두 큰언니네, 작은언니네, 나랑 여동생, 남동생에게 보낼 박스다. 광주에 사시는 이모한테도 보내야한다.

“한꺼번에 다 따지 말어라. 이번에 솎아내면 시나브로 시나브로 크고 맛있는 감이 된다”

감은 꼭 서너 번 나눠서 따야했다 그러다보니 한 달 내내 휴일이면 감 따러 시골엘 갔다.

“맨날 우리 집만 감 없다고 해서 맘 아팠는데, 얼마나 좋으냐. 많이 갖다 묵어라. 우리 집 감”

“가을에 감 있으면 다른 과일 하나도 안 먹게 되드라. 감이 달어서”

나도 결혼을 했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언니네랑 동생네까지 합하니 조카들만 헤아려도 족히 10명이 넘는다.

“올해는 내가 더 많이 가지고 갈께. 애들이 감을 잘 먹어”

그렇게 몇 년을 우리 형제들은 푸지게 감을 먹었다. 그렇게 푸지게 먹도록 감나무에는 늘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세월이 제법 흘렀다. 조카들은 직장엘 다니기 시작했고, 우리 집도 애들이 모두 객지로 나갔다. 아버지는 거동이 몹시 불편해지셨고, 감나무 약 칠 때에도, 감나무에 거름을 주실 때에도, 감나무 가지에 지지대를 댈 때도 우릴 불러 내리셨다. 그때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성이 차지 않은 아버지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며 감나무 앞에서 늘 잔소리를 하셨다. 이젠 감 먹을 사람도 없는데 연로하신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감나무는 청춘이었다.

“이번주에 내려오니라. 감 따야 한다”

감나무가 익어 가면 역시나 아버지는 노심초사하셨다. 직장에 다닌 우리는 한 달 내내 휴일이면 쉬지도 못하고 감 따러 시골에 가야만 했다.

“감나무에 올라가서 따지 마라. 감나무는 잘 찢어진다”

장대를 들고 감을 따는 건 생각보다 우아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고개도 아프고 팔도 쑤신다.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약도 없다는데 아버지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언니보다 감나무 걱정을 더 먼저 하셨다. 저 많은 감을 누가 다 먹는다고! 갈수록 주렁주렁 열리는 감이 부담스러워질 무렵.... 올해 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정말 오랜만에 시골집에 들렀다. 얼마 전 지나간 태풍 때문인지 감나무 밑에 감들이 우수수 떨어져있다. 그런데 감나무에 달린 감들이 벌써 다 익어가고 있다. 어? 벌써 저렇게 익으면 안되는데? 잘 여물어서 익은 게 아니다보니 맛도 영 없는데다가 살짝 손만 대도 땅으로 뚝뚝 떨어져버린다. 잎사귀도 거뭇거뭇하고 까만 반점에 여기저기 벌레 먹은 감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감나무가 주인이 없다고 1년도 채 안되었는데 형편이 없어졌다. 병이 난거다.

병약해진 감나무를 쓰다듬는데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게 올라온다.

감나무도... 너도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자랐었구나.

신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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