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망덕포구 수문…갯벌을 옥토로 바꾸다
[기고] 망덕포구 수문…갯벌을 옥토로 바꾸다
  • 광양뉴스
  • 승인 2019.12.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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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웅 前 광양시장
이성웅 前 광양시장

본래 진월면 15개 마을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마을이었다. 밀물 때가 되면 차동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잠겨서 배가 드나들었다. 그래서 차동의 옛 이름이 차의포(車衣浦)였다. 썰물 때는 온통 갯벌이 되어서 주민들은 동네 앞에서 조개를 잡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 이때 일본에서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선진지 경험과 식견을 갖춘 차동 출신 안상선(安尙善)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10여 년간(1936.4.30~1945.12.25) 진월면장을 역임하면서 갯벌을 옥토로 바꾸는 대역사(大役事)를 이뤄냈다.

안 면장 취임 당시 이웃 진상면은 면을 경유하여 목포~부산 간 신작로(현재 국도 2호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에 병행해서 그는 진월 선소까지 면 도로 개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선소 무접섬과 망덕까지 방조제를 축조하게 되면 갯벌이 옥토가 되고 도로도 개설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사업비 확보와 총독부의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얻어야 한다. 공유수면 매립허가는 명분도 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이 되나 막대한 공사비 조달은 쉽지 않을 것이어서 고심한 끝에, 신답 출신의 고향 후배로 광주에서 대판 매일신문 지국을 운영하면서 본정(현재 광주 충장로) 거리에 대형 건물을 짓고 서동 지역에 대규모 주택 사업을 하고 있는 오삼룡( 吳參龍 1911-1942)을 만나 설득하여 민자유치를 이루어냈다.

오삼룡은 일본에서 공업계 학교를 졸업하고, 정치적 야심도 품고 있는 열혈 청년이었다. 큰 사업을 제안 받고 망설임도 있었겠지만, 당시 광주에서 호남 제일의 재력가이고 호남은행을 설립한 현준호가 영암에 대규모 간척사업으로‘학파농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 안 면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듯싶다. 어쨌건 두 젊은이는 고향을 위해 갯벌을 옥토로 만드는 대사업에 의기투합하여 뛰어들었다.

방조공사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야말로 바닷물과 싸워야 하는 공사다. 지금처럼 대형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거의 전부를 인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현대의 대규모 서산 간척지 공사에 대형 폐유조선을 가라앉혀서 물막이 공사를 한 정주영 공법을 연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지만, 간석지 농토가 나오면 저렴하게 공급하겠다는 조건으로 면장과 시공사 대표가 설득하여 인근의 많은 인력을 동원했으리라 짐작된다.

착공 시기는, 목포-부산 간 신작로가 1937년에 준공개통이 되었고, 진상-진월 선소 간 도로 역시 안 면장 취임 후 2년여 만에 준공되었음을 미루어보아 1939년경 착공이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건 순전히 인력으로 시작된 그 공사는 천신만고 끝에 4년 만인 1942년 9월 16일 준공을 하게 된다.

방조제 연장 220m, 보조 둑 150m, 농경지 200ha(60여 만 평).

꿈에도 그리던 농경지가 60여 만 평이 조성되었으니 진월면 주민들은 우선 마음부터 배가 부르지 않았겠는가. 안상선 면장이 우리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고 칭송이 자자하였고, 아울러 오삼룡 대표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두 분이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안 면장은 공사 기간 중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업도 구상한다.

지금은 태인동 땅이지만 당시에는 골약면 태인도 땅이었던 배알도 정상에 해운정을 짓고 섬 아래쪽에 살림집과 여관을 지어 배알도를 유원지화하는 사업이다. 섬 앞에는 모래톱이 있어서 해수욕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 사업도 오삼룡 대표와 함께 추진하여 함께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천지개벽과 같은 대역사(役事)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안 면장의 탁월한 식견과 지도력 그리고 오 대표의 안 면장에 대한 형제적 의리와 사명감, 아울러 혈기 왕성한 젊은이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져 가능했던 성과였다.

그날 준공식을 마친 후에는 광주에서 가무단을 초청하고, 음식도 트럭으로 싣고 와서 대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진월의 최대 경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모든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광주로 돌아간 오 대표가 다음 날 밤 타계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향년 33세. 포부도 많고, 혈기도 왕성하여 한창 일할 나이에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공사하는 동안의 어려움, 공사비 자금조달 등 누적된 심신의 피로가 준공식을 마치자 한꺼번에 쏟아져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변고로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더 놀라운 것은 준공식 날 광주 본가에서는 그의 첫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의 아들 오문효(吳文孝) 씨는 본인과 진월 초등학교 동창으로 어려운 시절을 잘 극복하고 지금은 제주에서 편안히 살고 있다.

진월면의 획기적인 발전에 공헌하신 안상선 면장님, 오삼룡 대표, 두 분이 천상에서 영면하시옵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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