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1950년 전후 광양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문화칼럼] 1950년 전후 광양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 광양뉴스
  • 승인 2020.05.08 17:03
  • 호수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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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북구 (재)나주시 천연염색문화재단 운영국장
허북구 (재)나주시 천연염색문화재단 운영국장

고향 마을에 통천댁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늘 기침을 했다. 운명(殞命)의 순간에도 기침을 했다.

그분은 여수시 소라면 통천마을에서 필자의 고향 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침을 달고 살지는 않았다. 그런 통천댁에게 기침 증상이 나타난 것은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보리를 갈던 어느 날 시작되었다. 논에서 보리를 갈고 있는데, 반란군 트럭이 지나가다가 멈추고선 남편 이름을 묻고 적어갔다.

얼마 후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정부군이 그분의 남편을 체포했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옥곡으로 데리고 가서 총살했다.

통천댁은 수소문 끝에 남편이 총살당한 곳을 찾았다. 총살 현장에는 피범벅이 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피 묻은 얼굴은 모두 부어 있어서 남편을 찾기가 어려웠다.

비슷해 보이는 체구의 시체를 뒤적이는데, 송장 냄새가 확 풍겼다. 통천댁은 자신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이 기침은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통천댁은 기침뿐만 아니라 평생 빨갱이의 아내라는 멍에를 달고 살았다. 유복자가 된 아들은 남편과 자신의 호적에도 올리지 못 한 채 한 많은 생을 살았다.

고향 마을의 이○식 씨는 어스름할 때 군경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동네 남자들이 모이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반란군으로 오인을 받아서이다.

조○래 씨는 통천댁 남편처럼 반란군들이 이름을 적어 갔었다. 그리고 군경이 진압 한 이후에 총살당했다.

면장을 했던 윤○봉 씨는 저녁이면 숨어 다녔다.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집에 머물다가 반란군에게 잡혀서 죽었다. 박○식 씨는 형님이 순경이라는 이유로 반란군들에게 끌러가 죽임을 당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 한 후 6.25동란이 끝날 때까지 고향 마을에서는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끊이지 않았다.

군경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란군이나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가족들 중 일부는 한 평생 연좌제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

이러한 일은 1950년을 전후해서 광양 곳곳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교훈을 삼아야 함에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히고 있다. 기록은 없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분 두 분 돌아가시고 있다.

이번 21대 국회의원 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을 선거구에서는 여순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서동용 당선자는“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자 명예 회복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것은 그것대로 필요하다. 하지만 16대부터 20대 때까지 거의 매번 특별 법안이 발의됐음도 여러 가지 이유로 통과되지 않았다.

21대 국회에서도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은 장담할 수가 없는 가운데, 당시 비극을 겪었고, 보았던 분들이 계속 돌아가시고 있다.

생존해 계시는 분들도 연로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일들을 조사하고 기록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정현복 광양시장과 서동용 당선자의 임기 기간 정도일 것이다.

기록이 있다면 다른 세대에서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시급한 것은 생존해 계신 분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정현복 광양시장과 서동용 당선자의 책임감은 막중하다.

1950년 전후에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책임감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