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집에도 봄이
[기고] 우리집에도 봄이
  • 광양뉴스
  • 승인 2020.05.08 17:07
  • 호수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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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희 시민기자
신덕희 시민기자

완연한 봄이다. 동생차를 타고 고흥으로 가는 차안, 쏟아지는 아침햇살에도 두 눈이 정신없이 감긴다. 자동차 유리창을 몇 번이나 머리로 쳐 박고 나서야 시골집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언니가 형부와 형부친구라는 분과 같이 차에서 묘목을 내리고 있다.

몇 달 만에 들른 집은 어딘지 모르게 색깔이 바랬다. 밖은 따스한 봄볕이 내리 쐬는데, 온기 없는 방안은 싸늘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바람에 쓸려 들어와 마루 앞에서 회오리처럼 몇 번을 뒹굴었을 지푸라기며, 나뭇가지들... 집은 아직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깨진 시멘트 마당, 그 틈새를 비집고 자라고 있는 잡초 ‘망초’와 ‘명아주’가 보인다. 꼬장꼬장하셨던 아버지가 계셨으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잡풀이 떡 하니 자라고 있는걸 보니 여간 얄밉고 괘씸한 게 아니다.

작년 가을걷이 이후로 겨우내 놀렸던 집 뒤 넓은 텃밭에도 잡초들이 빼곡하다. 벚꽃이랑 매화야 기다리고 반기는 사람이라도 있건만, 어느 누구하나 환영하지도 않는데 온갖 잡초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노란 꽃망울이 활짝 핀 진달래는 그 노랫말처럼 훨얼훨 홀씨 되어 날아갈 기세이고, 여기저기서 하얀 꽃을 피운 잡풀들이 사방에 씨 뿌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낡은 액자 속의 흑백사진처럼 느껴지는데 저 풀들만 천연 칼라로 보여진다. 부아가 난다.

“이것들이 주인 없다고 지들이 주인행세를 하네.”

“다 뽑아내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잡초를 뽑기 전, 쪼그리 방석을 사기로 하고 읍내로 갔다.

“아저씨, 쪼그리 3개만 주세요.”

“예. 대, 중, 소 뭘로 드릴까요?”

“응? 우리는 엉덩이가 커서 대짜로 사야 하나? 대로 주세요.”

아저씨가 3단 짜리 쪼그리 방석을 준다.‘대중소’가 크기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높이에 따른 분류였나 보다.

“크흐흐, 우리 어렸을 땐 이런 신문물이 없었으니 알 수 가 있나? 저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우린 농어민등록이 안되어서 부가세를 포함한 금액인 9900원을 내야 한단다. 고작 900원을 더 내는데도 괜시리 서럽고 속이 상한다.‘소’쪼글이 방석을 샀다.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한참을 헤매다가 그림설명서를 보고서야 겨우 제대로 착용을 했다.

잡초가 워낙 튼실하게 자라 꼭 누구 머리채를 잡아 뜯는 느낌이다. 호미질을 하는데 땅속 깊게 박힌 뿌리까지 뽑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지기도 했다.

작은형부랑 같이 온 친구 분은 잡초를 보면서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댄다.

“저건 개망초고, 저건 왕꼬들빼기네. 저거 다 약 되는 것들인디...”

“아저씨, 저흰 귀하게 자라서 돼지고기, 닭고기 이런 걸 먹었지 이런 풀때기들은 안 먹고 컸어요. 호호호호.”

“그라지요. 저런 건 소나 묵었지요. 크크크크.”

농담 한마디에 깔깔 거리고 웃다보니 힘들다는 생각도 없어진다.

“이건 단감나무고 저건 대봉이네.”

감나무 잎사귀만 보고도 척척 알아맞히시는 전문가 포스가 물씬 풍기는 형부친구 분은 검정장화를 신고 뒷짐을 지고서 잡초가 제거된 곳을 이리저리 살피신다. 뭔가 적당한 곳을 찾으셨나보다. 준비한 묘목을 들고 와 형부를 찾으신다.

“어이, 여기다 심으세. 여기가 좋네”

탱자나무다.

“어? 탱자나무네? 탱자나무 맞지? 옛날에 언니 눈에 다래끼가 많이 났었잖어. 항상 아부지가 그거 짜야한다고 탱자가시 꺾어 오라고 하셔서 내가 상용이네 집 울타리에서 맨날 꺾어 왔었는데.... 언닌 다래끼 말고도 공곳도 많이 났었지. 근데 탱자나무는 왜 심어요 ?”

고염나무에 접붙여서 감나무를 만들 듯 탱자나무는 접붙이면 유자나무나 감귤나무가 된단다. 엥? 탱자나무는 탱자만 열리는게 아니었어요? 전문가의 포스를 풀풀 풍기시는 저 아저씨의 직업이 궁금하다.

부모님들이 계실 땐 몰랐었는데 400평 가까이 되는 텃밭이 크기도 크고 넓기도 참 넓다. 동생은 강원도에서 샀다는 싹이 난 감자를 가지고 와 심었고 (싹이 난 부분을 아래로 심어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해서 또 한바탕 논쟁이 있었지만), 형부는 치커리, 당귀 등 각종 쌈 채소와 비트 등 뿌리채소, 그리고 더덕 씨를 뿌리셨다.

“내가 어렸을 때 산 몰랑[산마루]에 있는 우리 고구마 밭에서 도라지 꽃을 봤거든. 나는 그게 산에서 나는 산삼인줄 알었어. 그래서 누구한테 들킬세라 뺏길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캐서 이 밭으로 옮겨 심은 적이 있었거든. 이거 잘 키우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주 그 꿈이 장했어.”

“여기 토마토랑 가지 심었던 곳인데... 가지는 하두 따 먹어서 맨날 입술이 새까맸지.”

옥수수 모종도 심었다. 잘 여문 옥수수를 끊어다가 큰 솥에 사카린과 소금을 조금 넣고 쪄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엄만, 딸들이 전부 옥수수를 좋아한다고 밭 가장자리를 빙 둘러 한 틈도 없이 빼곡이도 옥수수를 심으셨었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 덕분에 1년 내내 고소하고 맛좋은 옥수수차를 마셨다.

형부는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감나무 주위를 동그랗고 이쁘게 돌담을 쌓고, 그 둘레 밖으로 마로니에랑 가시오가피 묘목을 심었다. 한 여름 감꽃이 지고 나면 감나무에 약도 쳐야 할게다. 재작년이었던가, 거동이 불편한 당신을 대신해 감나무에 약을 치던 형부가 못내 성에 차지 않아 호통과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의 얘기는 이번에도 또 어김없이 회자되었다.

“아이고, 장인어른의 그 성깔을 누가 당해 내.”

넓은 밭이 발걸음 떼는 곳마다 추억이 있고, 엄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 호미질 하나에 옛이야기가 하나씩 캐 나온다.

잡초들이 다 뽑힌 깨끗하고 정갈한 밭을 보니 이제야 좀 우리 밭 같다.

정말 완연한 봄이다. 뿌린 씨앗들이 하나 둘씩 싹을 틔우고 나면 우리 집도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같이 숨 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