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삶’을 조명한다
‘선비의 삶’을 조명한다
  • 광양뉴스
  • 승인 2020.05.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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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살겠다 갈아보자’ 창안한 진월 출신 신영길 박사
故 신영길 박사

귀향한지 10년이 지났다. 당시 생각은 기왕 고향에 왔으니 퇴직자 틀을 벗고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고장 역사와 문화를 학습해 대중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 역사문화관 해설사 모집에 교육을 받고 현장에 6년간 종사하면서 기초를 다지기 위해 각 읍면동과 부락을 순회하며 특성과 문화를 엮어가고 있을 때 국사편찬위원회로 부터 각시군 고서(古書)를 조사해 영상으로 보고하면 영구보존한다는 프로젝트가 있어 그 업무를 진행하면서 많은 역사와 문화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귀감이 되는 인물이 많다는 것에 고무되기도 했다.

또한 장서가로 기네스북과 광양시지에 기록된 선비가 있어 놀라웠다. 또한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 선거표어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창안한 신영길 박사, 고심 끝에 여수시 여서동 댁을 신영식 사진작가와 방문했다.

신 박사 삶의 여정은 너나 방대하기 때문에 대담과 서문내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 대담내용]

첫 만남이었지만 향우라서인지 형제인양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상, 우람한 체격에서 풍기는 학자다운 기풍과 온화한 말씨에 고개를 숙였다.

거실 벽에 걸린 작품, 전국한시대회 최우작품을 자필 초서로 쓴 액자는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다.

차를 마시며“선배님의 걸어온 길을 알고 싶습니다”했더니 2시간동안 질문의 기회도 없이 설교처럼 시작한 사연에 감명이 깊어졌다.

「광양시 진월면 마동리에서 1926년 9월 3일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 시작의 발로는 초등학교시절 부터다. 소를 먹이고 꼴을 베서 건사는 일에 세월이 흘렀고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 때까지 수석을 독차지했다.

湖堂 申永吉文集 서문에 태극기 사건으로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낙인찍혀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됐다.

보통학교 4학년 때 섬진다리 개통식이 1935년 7월에 있었는데 선친께서 동행을 요구해 따라가서 식을 마치고 하동쌍계사를 방문했는데 입구 문에 태극마크가 선명히 그려져 있던 것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 학교미술선생께서 각자 생각하는 그림을 그려내라는 학습에 그 문양을 그려 낸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주재소에 신고해 붙잡혀가 1개월간 진주형무소에 구금됐으나 미성년으로 출소했다. 이로 인해 중학교 진학의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향학열을 품고 있던 소년은 흐르는 세월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지인의 권유가 있어 여수로 나가 구직을 위해 헤매고 있는데 마침 구인 방이 붙어 찾은 곳은 일본인 점포였고 주인장은 배(船) 부속품을 도매하는 상인이었으며 해야 할 일은 수금하는 일이었다.

종사하는데 때가 되면 홀로 주는 밥상 앞에서 부모를 생각하니 목이메어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하면서 잠시 숙연해졌다.

왜인고하니 끼니 마다 흰쌀밥에 고기 국을 주니 어찌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겠는가.

주인장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된 것은 수금할 때 춥거나 덥고 어려운 때는 납부금을 주는 업자들이 가끔 간식이나 하라며 몇 푼의 잔전을 주었지만 모아서 저녁에 결산할 때 모두 떨어 놓으니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반복하니 신임이 두터워졌다.

행운인지, 당시 주인댁 따님은 서울에서 중학교 재학 중이었고 방학 때 집에 오면 자기가 배우던 교재를 선심인지 동정인지 주고 간 것을 잠을 설치며 독파해 공채에 합격해 방년의 나이에 순천 철도국에 정식직원으로 부임하니 다들 놀라워했다.

또한 철도국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니 일본인 역장이 법전을 주며 공부하라는 암시를 주어 영재답게 기회를 잡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변호사 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할 때 8.15광복을 맞았다」는 것을 꼭지점으로 끝없이 전개된 내용은 여기서 멈추게 되는 것은 걸어온 길이 너무 험난했고 복잡하기 때문에 문집을 요약하는 것이 좋을 듯해 구분한다.

 

[2. 신영길 문집 중 편집한 내용]

광복을 맞은 감격의 시절에 건준(建準)여수(麗水)지부에 잠깐 머무른 후 시험을 거쳐 합격 후 경찰에 투신했고, 경찰재직 시 서울지역 파견으로 경교장 근무 때 백범 김구 임정 주석 곁에 근무할 때 따뜻한 배려도 받았다.

그리고 국군 제14연대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는 사건의 한복판에서 경찰관으로서 겪었던 참담했던 일, 그 후 자유당 치하에서 재야에 몸을 담고 민주화의 길을 걷던 가시밭길은 잊을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 고문으로 인해 5급 2호 장애인이 된 나는 지금도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자유롭지 못하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 외자청 주사공채시험에 합격해 경제관료로서 외자청, 경제기획원, 재무부, 대통령비서실 등 8년간을 근무하였으나 계속 주사직급을 면하지 못했다. 이는 나에게 붙어있는 요시찰인물 딱지 때문이었다.

특히 혁명 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자동원에 절대적인‘국민저축조합 저축특별법’제정과 경제개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장기영 부총리의 내자 조달시책을 책임지고 주도함은 물론 재정경제부나 재무부의 주요업무를 상당부분 도맡아 진행하는 등 서기관이나 이사관이 해야 할 업무를 맡아 처리해 나갔다. 그래서 이진복 당시 체신부장관은 농담 삼아“신영길 씨를 주사관으로 호칭하자”고 하여 주위를 웃긴 일도 있었다.

내가 요시찰인물이 된 것은 자유당치하의 야당투쟁 경력 때문이었다. 나는 자유당정부와 5.16 후의 군사정부아래서 6회의 옥고를 치렀고, 중앙정보부에도 5회나 연행 구금당했다. 나는 그래서 8년의 주사 직에 비애를 느껴 1967년 금융계로 자리를 옮겨 주택은행 근무 15년을 역임하고 공직을 마감했다.

그러나 공직마감 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서대문 지점장으로 있을 때 김대중 선생의 동서인 김소환과 부인 이희호 여사의 청을 받고 독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암흑의 시대인 1980년 11월23일 사형수로 청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김대중 선생의 구명탄원서를 쓰고 난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의 인생은 1952년 유석 조병욱 박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만남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재 선생은 신군(辛君)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으나 공직에서는 출세하지 못할 신상이니“전기 서책이나 귀중문서 지도 등의 수집과 집필이 연분이라”는 가르침에, 나는 역사서적, 일제의 침략서적, 각종지도, 국경관련 도서 등 7만 여권을 수집 소장하게 되어 기네스북에 오르고 책은 광운대와 이화여대에 기증하였다.

나는 정치인생활, 경제부처 공직생활, 금융인생활을 끝내고도 끊임없이 언론활동과 국토회복의 대상인 대마도·간도·독도에 관한 논문을 비롯하여 이순신장군·장보고 등 시사칼럼 505편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외 20여권의 책을 저술하고 역술했다.

또한 TV방송에 92회 라디오방송에 63회 출연했고, 결혼주례도 63회 진행했다. 나는 이 같은 한평생을 회고록으로 정리하고 서울생활 50년을 접고 나서 2006년 6월 여수로 환소귀향 하였다.

나는 노년에는 여유로움 속에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을 한데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에 몇 가지를 선별하다보니‘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조선조 망국전야기와 북방영토 간도와 청국비시문이 손에 잡혔다’라고 기록했다.

삶을 전수 할 수 없으니 생략하고 흔적을 찾아본다.

첫째 학력 ① 진월보통학교 졸업 ②조선대학전문부 정치학과 졸업 ③ 국방대학원 수료 ④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⑤ 명예정치학박사 학위(광운대학교)

두 번째 경력 ① 전라남도 순사시험 합격 ② 조선변호사 예비시험합격 ③ 제1회 고등전형고시 행정과 합격 ④ 제1회 전국한시대회 장원.

셋째 근무 및 경력 ① 순천 철도국 ② 여수 경찰서 ③ 금융권근무, 정부 중앙부처(재무부 외 4곳) 근무.

넷째 저서 ① 일제 침략사 ② 한국 재정사 ③ 한국정치사 ④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 현장 ⑤ 돈의 전쟁 상·하 외 15여권.

다섯째 경력 ① 자랑스런 전남 광주인상 ② 모범장서인상 ③ 자랑스런 서울시민 상 ④ 기네스 기록 인정서상 ⑤ 독서 왕 호당칭호상 등.

신박사의 업적비가 진월면 마룡리 대로변에 수립돼 있어 함께 게시한다.

신영길 박사가 창안한 구호로 만든 1956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와
이를 기념해 만든 진월 마동의 기념비

[일화 한 토막]

1956년 4월 5일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는 ②번, 부통령 후보 장면은 ①번으로 추첨되었다. 선거운동을 시작하는데 자유당과 민주당은 운동방식부터 다르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로 인원동원, 선거벽보, 후보자 이동 등등 여러 분야에서 흐름이 막히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대책 회의가 끝나고 엄상섭이 민주당 중앙당 인권옹호 위원회 의장 직무를 맡고 있었다. 조재천은 민주당 선전부장 직책에 있었다.

엄상섭 의장 사무실을 심방했다. 두 분은 필자와 동향인이었기 때문에 자주 들렀다. 그날 엄 의장과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의장이“이번 선거에 그럴싸한 표어하나 지어보라고 하기에 언제까지 지어야 되느냐”고 반문했더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며 내일 중으로 지어 오라라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

숙소인 태화관에 돌아와 상념 끝에 5가지(① 못살겠다 갈아보자 ② 썩은 정부 도려내자 ③ 일당독재 타도하자 ④ 썩은 정부 갈아보자 ⑤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작성해 다음날 사무실에 전하고 여수로 출발할 준비를 하는데 의장으로 부터 삼각동 대추나무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도착해 보니 조재천 선전부장도 함께 있었다. 세 사람은 식사에 약주를 한잔하고 나서 조 부장이 표어가운데 ①, ③, ④ 중에서 선택하자며 칭찬해 주었다.

그해 4월 11일 첫 선거유세는 서울 종로 수송초등학교에서 열렸다.‘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현수막과 피켓이 물결쳤고 3만여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첫 번째 정견발표는 성황리에 끝났다.

‘못살겠다. 갈아보자’와‘일당독재 타도하자’의 구호는 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대한민국 선거사 표어 중‘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광고 선전판 원고 한부가 유일하게 보관 중이다.

목판으로 가로 1m 세로 1.2m 크기로 중앙에 세로로‘못살겠다 갈아보자’라 쓰고 왼쪽에 부통령 후보 장면박사·오른쪽에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영정으로 구성돼 있으니 희소가치가 대단하다. 진품 명품에 출품해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어떠할지?

 

조동래 광양전교 / 정리=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