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숲은, 숲만의 시간이 있다
[기고] 숲은, 숲만의 시간이 있다
  • 광양뉴스
  • 승인 2020.06.1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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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숲해설 2년째의 봄, 숲은 뜻밖의 선물을 안겼다. 산뜻한 봄의 시간이라 생각한 4월과 5월. 그 시간 우리 동네 숲에서 두 번의 봄을 만나고, 여름을 만나고, 시간을 거슬러 가을을 만났다.

가야산 둘레길에는 키 큰 신갈나무가 가로수처럼 들어서 그늘을 만드는 숲길이 있다. 신갈나무는 보통 극상림, 즉 숲이 성장의 최고점에 이른 자연림의 능선이나 정상부의 척박한 땅에서 세력을 이루며 키 작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야산 둘레길 신갈나무는 커다란 키를 자랑한다. 신갈나무 사이사이로 진달래, 히어리, 철쭉이 시간차를 두고 피고지면서 봄이 지나고 4월 중순이면 벌써 여름이 찾아든다.

비 온 뒷날, 일찍 찾아든 초여름 신갈나무 숲길을 걸으면 푹신푹신한 땅에 닿는 발바닥 느낌, 솔잎 냄새, 햇볕에 반짝이는 신갈나무 잎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 그 모든 것이 다 선물 같다.

그런데 새소리가 생각보다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알을 낳아 품고 있거나 새끼를 키우고 있어 천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민감한 시기라 조심하느라 그런 것 같다.

가야산에서 봄이 물러날 때쯤, 백운산에는 그제야 봄이 찾아들고 5월 중순이 되어야 곳곳에 봄이 깊숙이 자리를 잡는다. 가야산에 비해 거의 한 달 정도가 늦다. 얼레지, 족도리풀, 노랑제비꽃, 개감수 등의 야생화로 시작해서 히어리, 철쭉, 산앵도나무 꽃이 피고, 참나무, 쇠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가 차례로 싹을 내면 봄이 깊숙이 찾아들고, 가야산에서는 볼 수 없는 함박꽃나무 꽃의 시간이 찾아오면 봄이 끝난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신선대에는 오르지 않고, 신선대의 커다란 바위 그늘에 앉아 정상을 바라본다. 연한 초록 싹을 내기 시작하는 참나무의 가지가 드리운 가지 사이로 정상이 보인다. 여름날 저 멀리서 소나기가 다가올 때처럼 앞이 뿌옇게 흐려 보인다. 미세먼지 때문이 아니다. 싹을 틔우기 위해 뿌리가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뿜어 올린 물이 줄기로 가지로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겨울눈으로 이동해 물이 오른 나무들이 통통해지면서 만들어내는 색이다.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 뿌연, 멀리서 다가오는 소나기 같은 색이야 말로 봄을 예고하는 색이다. 신선대 바위 그늘에 앉아 그 기분을 느껴본 사람이 있을까.

같은 동네에서 연이어 두 번의 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그건 1222미터의 높은 산, 백운산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 산이 주는 선물이 단지 이것만은 아닐 텐데. 내가 그 산을 너무 모른다. 그 산이 궁금하다. 그래서 올해는 매달 백운산을 오르며 그 산의, 그 숲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1월에 도시공원 모니터링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제철주택단지 야산(근린공원)에서 녹나무 군락지를 발견했다. 자생지는 아니고 공원조경수로 심은 나무에서 날린 씨앗들이 높은 발아율을 보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자 자생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의 봄을 만나고 녹나무 꽃을 보러 갔다가, 웬걸 가을을 만나버렸다. 빨갛게 노랗게 물든 녹나무 잎이 떨어져 주변을 가을로 바꿔 놨다.

잎갈이를 한다. 소나무는 2~3년에 한 번씩, 요즘 가로수로 흔하게 만나는 먼나무는 1년에 한 번씩 봄에, 대나무는 여름쯤. 녹나무 역시 잎갈이를 할 텐데. 운 좋게 내가 찾아간 그때 한창 잎갈이 중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때 아닌 가을을 만났다. 녹나무가 만드는 가을 풍경을 넋 놓고 보다가 물든 잎을 몇 장 주워 왔다.

2020년, 광양의 봄 숲에서 두 번의 봄을 만나고, 여름을 만나고, 가을을 만났다. 덕분에 알고 보면 너무 단순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숲의 시간은 모두 똑같지 않다. 숲마다, 숲만의 시간이 따로 흐르고 있다. 사람들도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간다. 사람도, 숲도 저마다의 시간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지 어렵다.” 뭐 이런 개똥같은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