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❸ 내가 숲으로 가는 이유
[기고] ❸ 내가 숲으로 가는 이유
  • 광양뉴스
  • 승인 2020.07.17 17:27
  • 호수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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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죽은 나무에서 새 생명이 다시금 태어났습니다! 뿌리를 뚫고 나오는 새 생명의 에너지가 감동입니다.”

7월에 받은 휴대전화 문자 중에 최고 반가운 내용이다.

“드론이 나는 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렙니다. 2030세대는 숲에서 가슴 설렐 나이는 아니죠.”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말 같지만 실은 같은 사람이 한 말이다. 두 번째 말은 올 봄에 처음 만났을 때 ‘2030세대는 숲에 감흥 할 수 없는 세대일까요?’라는 내 질문에 잠시의 망설임 없이 했던 대답이다. 더불어 2030시절 내가 숲에 감흥했냐고 되물었다.

우리 나이로 ‘마흔일곱’해를 살고 있다. 난 2030시절 숲에 감흥했던가? 난 그 시절 숲이 좋았다. 그저 그냥 좋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숲을 탐색하는 즐거움, 숲길을 걷다 발을 멈추고 그 숲에 모든 것들에 눈 맞추고 숲이 주는 메시지에 귀 기울일 줄은 몰랐다. 그저 숲이 만들어내는 색이 좋았다.

그래서 구지 숲을 찾아 산을 오르고 발품을 팔아 도시공원 곳곳을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저 먼발치로 보이는 산을 보고, 내 일상의 테두리에서 만나는 가로수와 공원에서 만나는 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 딱 그것, 그만큼으로 충분했다.

그 시절 나는 지금처럼 숲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을 당연시하지 않았다.

도시공원 곳곳을 발품 팔고 다니는 수고로움이 없는, 그저 내 생활공간 언저리에서 어떤 노력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 그 곳에서 저절로 마주한 숲에만 반응했다. 그 시절 나는, 숲 밖에 서서 숲의 피상적인 모습에만 반응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몰랐다. 숲의 생명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늘 그 자리에 서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며 생각하고 판단하여 주변의 모든 것들을 활용해 왕성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없었다.

식물과 곤충들이 만들어내는 공진화의 놀라움도 몰랐다. 그들은 동맹을 통해 서로 돕는 동시에 견제하며 세력을 넓힐 줄 안다. 때로는 동맹 이상의 공생을 하며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온전한 연합체를 만들기도 한다.

숲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훨씬 조밀한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이 숲을 숨 쉬게 한다. 그 관계망을 이해하는 만큼, 그 만큼씩 숲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지고 그로인한 놀라움이 동반된 감흥은 더 충만해진다.

2030시절 몰랐던 것을 이제 서서히 이해하고 있다.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의 나는 멀리서 피상적으로 숲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는 자발적 수고로움을 통해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과 눈 맞추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알아간다. 그 존재들의 치열한 삶을, 좌절을, 고민을, 실수를.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숲의 모든 존재들의 삶을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목격하는 날이 많아진다. 딱 그만큼씩 감흥이 쌓인다. 그 감흥의 여운이 좋아서 그 여운을 이어가고 싶어 자꾸 숲으로 가게 된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느티나무 그루터기의 뿌리에서 돋고 있는 맹아지를 보며 감동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그 사람도, 이제 숲에 드론의 비상 못지않은 설렘이 있음을 알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