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귀농 일기
천방지축 귀농 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0.07.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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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맛 비

 

오랜만에 구름 걷힌 하늘을 본다.

구름은 얇아졌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찐득한 습기가 묻어있어 작업복을 입고 싶지 않은 날이다.

길게 이어지는 장마 덕분에 농부의 휴식도 길어졌다. 휴식의 길이만큼 잡초의 키도 길어지고 있어 걱정은 된다.

칡넝쿨은 도로를 넘어 반대편 고사리 산을 습격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고 도깨비 풀의 줄기는 굵어졌다.

산초나무 아래서 세력을 넓혀가는 바래기 풀은 장맛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놈답게 하늘에 닿을 기세로 커 가고 있다.

봄에 심어둔 초피(제피)나무는 잡초에 갇혀 모습을 감췄다. 우뚝 솟은 대나무 막대기가“근처에 초피나무가 있으니 살려 주세요”라는 구조 요청을 대신하고 있지만 불어난 계곡 물 소리에 희석되어 희미하게 들린다.

날씨, 참 변덕 스럽다. 갑자기 잿빛하늘로 변하며 구름이 낮게 내려앉더니 후두둑~! 장마철 아니랄까봐 요란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 한다.

모처럼 좋아진 날씨에 여기 저기 둘러보고 고추밭에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짜장면 면발처럼 굵어진 빗줄기에 갖혀 버릴줄 알았으면 미리 나서는건데...

고추 농사의 승 패는 장마철 병충해 관리에 따라 결정 된다.

담배 나방이 구멍을 뚫고 지나간 자리에 빗물이 들어간 고추는, 물에 젖은 화장지를 걸어 놓은 듯 힘없이 쳐지고 갑자기 습기가 많아져 생기는 열과 현상도 이때 생기게 된다.

가장 무서운 탄저병과 역병은 빛의 속도로 번지며 농부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놈들이다.

습도가 높은 장마 기간이 지나면 꼬리를 감추기도 하는 녀석들이다.

금년 고추 농사는 그럭저럭 관리를 잘 해오고 있다. 가끔씩 담배나방 피해를 당해 옆구리에 총알 맞은 몰골을 하고 위태롭게 달려 있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건강하게 잘 커 가고 있어 풍작이 예상 된다.

벌써 빨간 옷으로 바꿔 입고 동료들과 이별 준비를 하는 녀석들도 있어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농막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고사리와 키 경쟁을 하며 이쁘게 피어 있는 나리꽃이 온 몸으로 비를 받아들이며 토란 잎으로 태어나지 못한걸 후회하고 있다.

노래 공연도 비 때문에 무기한 연기가 된 듯 조용해졌다. 다림질을 해 놓은 듯 고르게 펴진 하늘을 보면 금방 그칠 거 같지는 않다. 세상 모든 것들이 비에 젖어 꿉꿉한 계절이지만 휴식이 길어지는 농부의 마음만은 뽀송뽀송한 계절이다.

 

이우식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