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건축 위에 사람
[기고] 건축 위에 사람
  • 광양뉴스
  • 승인 2020.08.21 17:13
  • 호수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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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진
건축 / 도시공학박사
노성진공간연구소장
노성진 건축 / 도시공학박사 노성진공간연구소장

향기 있는 건축가로 존경하는 정기용 건축가가 있다. 어린이 전용도서관 건립 활동인 ‘기적의 도서관’, 제주 4·3 평화공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해 봉화마을 사저 등을 설계했던 건축가... 그는 건축 앞에 꼭 사람을 놓아두는 설계를 해 왔다. 건축 앞에 사람을 놓아두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라도 현대에 있어서 건축가는 귀찮은 거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내 뱉은 현대의 예술가에게 한 말은“자신들이 거지보다 훨씬 고상해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귀찮은 거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까지 했다. 이것은 언제든지 언변과 지식으로 화장을 하고, 유혹하고, 파멸도 시키며 계속해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충격적인 찔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건축가들은 과연 건축보다 사람을 앞에 두었는가를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남의 돈으로 자신의 작품놀이를 하려는 건축가를 말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건축가는 문학가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건축을 문학하지 않고 건축되어지는 것은 사람을 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국 오번대학의 사무엘 막비 교수 겸 건축가는 평생을 자신의 작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에게 건축을 선물했던 사람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사람이 행복하지 않는 건축은 파멸을 안겨주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류에게 남겨진 모든 기록이 서사인데 건축만큼 해악적이거나 폐쇄적인 요소는 없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장과 건축의 외부는 이웃을 위해 존재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마치 시적감성이 하루 또는 현재를 위로 하듯...

조선 말기에 전기라고 하는 중인화가가 매화꽃이 반발할 때 친구를 찾아가는‘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를 그렸다. 술 한 병 보자기에 싸 어깨에 메고 산골 친구를 찾아 간다. 친구는 오경석이라는 사람으로 같은 중인 출신 역관이다. 친구는 매실 밭 주인으로 친구가 찾아 올 줄 알고 창문을 열고 피리를 불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 한 장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감흥을 지금 현대인들은 사실상 무시하고 살고 있다.

OECD에서 자살률 1위라는 명예롭지 못한 명예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챙겨 살아야 하는 잔 감정들을 얼마나 외면하고 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풍요로운 도시 속에서 우리는 철저히 고독孤獨한 것이다.‘매화초옥도’는 짱박힘의 미학, 안반락도(安貧樂道)의 미학의 본질로서 사람을 품어주는 집과 건축으로 시작되는 것이란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그림이다.

관아재가 남긴‘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가 있다. 관아재 노년의 최대 명작은 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관아재 작품 중 제일 큰 작품으로 그 묘사의 사실성, 소재의 현실성, 인물의 조선풍, 그림 전체에 풍기는 문기나 문체로 보아 우리 회화사상 불멸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할 수 있다. 여기에도 건축과 사람이 적정하게 균형을 이루고 많은 시적 감정이 복합된다. 동자를 데리고 은거독서 하는 한 선비의 집에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날, 반가운 문친이 동자에게 고삐를 맡기어 소를 타고 찾아오고, 두 선비는 서재에 마주 앉아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치고 있는 이야기다.

이 또한 건축이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풍경을 만들어 내는 문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집은 그래서 문학인 것이다. 우리 가슴에 남겨진 어머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노자는 인간은 스스로 만족의 한계를 규명 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도道를 두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려 했고 이는 음양(陰陽) 중 양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道)는 혼자서는 그 힘을 발휘 할 수 없으므로 음(陰)에 해당하는 덕(德)‘무위자연(無爲自然), 유연(柔軟), 겸허(謙虛), 무욕(無慾), 무명(無名), 소박(素朴)’을 두어 두 요소가 서로 보완작용을 하며 합일 되는 것을 자연의 이치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조금 독특한 무명(無名)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건축에서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덕목으로 다른 모두에게서 나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화하려는 의도를 설명하는 대목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 한 덕의 행위들을 모아서 이 사회는‘덕목(德目)’이라는 단어로 종합하는 것이다. 사람의 건축은 결국 덕 있는 사람의 소유물이었을 때 사람이 건축 앞에 선다는 것을 노자는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 같다.

강력한 자본의 논리가 점거한 우리의 도시에서 인간을 위한 물러섬이나 양보, 공적여유 공간이 생성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보여 진다.

일본의 건축가‘시게루반’은 집을 잃은 자들을 위한 종이파이프 건축을 고안 해 내고 현장에 활용되었고, 핀란드의 가구기업‘이케아’는 사회환원에 기여하는 200만원짜리 조립식주택을 보급하고 있다. 자본의 가치보다 수만 배의 가치를 가지고 사람을 위한 건축에 실천적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 김진애 씨는‘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이라는 책에서‘걷고 싶은 도시가 가장 좋은 도시이고, 만지고 싶은 건축이 가장 좋은 건축’라고 했다.

우리의 오감 중에서 한국인이 가장 행복해 하는 촉감에 해당 되고 이는 가장 정직하게 우리의 본능을 드러내 주고 모두에게 촉감을 속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형태와 시각적 현란함에 속지 말고, 우리 눈의 거짓말에 속지 말고, 우리의 몸에 귀를 기울이면 몸을 위한 건축, 사람을 위한 건축이 보인다고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