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호복기사(胡服騎射) : 오랑캐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쏜다
[고전칼럼] 호복기사(胡服騎射) : 오랑캐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쏜다
  • 광양뉴스
  • 승인 2020.10.23 15:49
  • 호수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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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중국은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전국칠웅이라 일컫는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일곱 나라가 각각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조(趙)나라는 중원의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오랑캐라 불리는 흉노(匈奴)와 연나라의 위협에 노출되어있고, 서쪽에는 강대국 진나라와 한나라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남쪽의 초나라로 둘러싸인 전략적으로 요충지이므로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서기전 4세기 중반 조나라에 개혁적인 군주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할 때에 나라의 존망을 걱정한 군주가 하루는 만조백관이 모인 앞에서 변해야만 살아남는다고 하면서 신하들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강력한 군대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으니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무릇 세상에 이름을 높이고자 하면 익숙한 풍속을 바꿔야 하는 법이오.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하오.”

호복을 입는다는 것은 대단한 혁신(革新)을 의미한다. 당시 조나라는 문물이나 문화면에서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이었다.

그런데 호복을 따른다는 것은 획기적인 발상으로 훨씬 미개한 오랑캐를 벤치마킹 하자는 이야기였다.

당시 조나라의 의상은 저고리에 치마를 입는 복식(複式) 의상이었다.

중원의 자존심이며 선진적 문화(文化)였다.

호복은 짧은 바지에 간편한 저고리로 야만인의 상징처럼 생각하던 때였다.

조나라를 비롯한 중원문화는 전쟁에 있어서 기본단위는 병거(兵車)로 이루어지는데 네 필이 끄는 마차에는 마부에 해당하는 어자, 활을 든 차좌, 창을 든 차우로 이루어 4명이 1개 조를 구성하여 탑승한다.

그리고 그 뒤에 갑옷 입은 무사인 갑사, 보병, 치중 등 약 30여명이 한 편대를 이루는데 이 부대 단위를 1승(乘)이라 불렀다.

이 단위를 기초로 천승(千乘)지국 만승(萬乘)지국으로 부르며 제후국의 병력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조직은 그때까지는 계속 해오던 터라 별로 불편함 없이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살육 전쟁이 벌어지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취약점을 보완해서 이겨야만했다. 병거가 지나가기 위해서는 길이 평탄하고 넓어야 했으며, 이런 구시대적 방식은 행군 속도도 느리고 전투에는 매우 비효율적 이었다.

특히 산악지대에서나 수중전이 있을 때는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패배가 잦았고, 북방의 흉노나 서방의 융족(戎族)들과 싸울 때에도 기동력이 좋은 기마민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북방오랑캐들은 야만인이라고 가볍게 보아왔으나 활동하기 간편하도록 짧은 소매에 간단한 바지를 입고 전투에 임했다. 간단한 바지(胡服)에 말을 탄 채로 활을 쏜다.

이러한‘호복기사’는 기동성과 전투력에 있어서 중원의 나라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였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이었다.

이때 조나라 무령왕이 비록 야만인이라도 좋은 것은 본받아야 한다고 그들의 기동력과 경제적인 전투방식을 받아들여 획기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중원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병거를 버리고, 오랑캐의 저속한 풍습 같은 호복기사를 따라 하는 것이 무령왕은 살아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갑작스런 오랑캐의 벤치마킹을 따라주느냐가 문제로 등장했다.

무령왕은 정면 돌파를 목적으로“이제부터 과인은 호복기사를 모든 백성에게 가르치고자 한다. 세상은 과인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인데 경들의 좋은 의견을 말해 보시오.”

조정의 반발을 생각보다 거셌다. 그러나 무령왕의 끈질긴 설득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먹히기 시작 했다. 그의 혁신이 이루어 질수 있는 근거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무령왕은 혁신적인 통찰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갑작스런 변화에 저항을 예상하고 감내하였다.

마지막으로 끈질기면서도 타당성을 제시하며 효율성을 설명하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호복은 보급되었고 기병(騎兵)과 사수(射手)를 모집하여 훈련시킨 결과 막강한 군대를 갖추어 영토 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무슨 일이든지 최고 권력자가 믿음을 가지고 설득을 한다면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타당성이 인정되면 동의하는 것이 지각 있는 사람이다.

현 시대에도 무령왕같은 군주가 있다면 반대할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