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가을의 축복
[생활의 향기] 가을의 축복
  • 광양뉴스
  • 승인 2020.11.06 17:23
  • 호수 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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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시인•소설가
유미경시인•소설가
유미경 시인•소설가

일층에 사는 남순 씨가 밤을 주우러 가자고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따가운 햇볕 속으로 나가는 것도 싫었고, 힘겹게 줍는 것보다 사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순 씨는 몇 번씩이나 전화를 했고,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재미있다며 가자고 거듭 말했다. 더 이상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준비해서 일층으로 내려갔다.

제철 주택단지로 이사 온 지 20년이 넘을 동안 나는 한 번도 밤을 주우러 간 적이 없다. 주위 사람들이 밤 주우러 간다고 했을 때도 별 관심이 없었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그런 것 자체에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하루에 만보 이상씩 걷는 운동을 하다 보니, 주위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동네엔 밤 뿐 아니라, 석류와 감 등 과일 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꺼번에 모두 따서는 안 되지만, 동네 길을 걸으면서 눈에 띄는 과일을 한두 개씩 따 먹어도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요즘은 길에 떨어진 감이나 밤을 줍는 것도 절도죄가 성립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 먹어도 되는 곳이 있다니 신기했다.

20리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니던 때는 늘 배가 고팠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면 허기가 졌다. 첫 시간이 끝나자마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도시락을 먹어버렸고, 점심때는 물로 배를 채웠다.

수업을 마치고 또다시 20리길을 걸어서 집에 가려고 하면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배가 고팠다.

학교 밖으로 나오면 길옆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나는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다.

많이 주운 날은 가방에 넣고 걸어가면서 먹었다. 가끔씩 과수원 주인이 그것을 보고, 상처가 난 사과를 한소쿠리 건네줄 때도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먹으며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사과를 너무 많이 먹은 날은 입안에 새콤달콤한 사과향이 배여 잠 잘 때까지도 사과를 입에 물고 있는 듯했다.

사과를 주울 수 없는 날은 길옆에 있는 밭에서 감자 고구마 같은 캐서 구워 먹고, 무를 뽑아 먹기도 했다.

참외나 수박이 열려 있는 밭은 지날 때는 원두막에 앉아 있던 주인들이 올라와서 먹고 가라고 할 때도 있었다.

길에 떨어진 감 한 개 줍는 것도 절도죄가 될까 두려워 피해야 하는 삭막한 현실-그것이 바로 오늘날이다. 인간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따뜻한 정이 사라지고 사랑이 죽어가고 있다.

밀을 꺾어 구워 먹고 고구마와 감자를 캐 먹어도 죄가 되지 않던, 가진 것을 서슴없이 나눠주는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던 곳-내 고향의 그 날들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지는 날이다. 친구들과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고 서로의 입가에 묻은 검은 재를 보면서 목젖이 보이도록 소리 내어 웃었던 시절. 그런 날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찾았다!”풀숲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밤송이를 잡고 나는 소리쳤다.

“언니, 나도 보물 찾았어요.”남순 씨가 나를 보며 밤송이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우리는 마주보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머리 위로 축복처럼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