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숲도 기억할 때 지켜진다. 여덟 번째 이야기
기고 - 숲도 기억할 때 지켜진다. 여덟 번째 이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0.12.24 17:37
  • 호수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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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마지막 나무를 자른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라파누이의 슬픈 전설’을 강의한 재러드 다이아몬드에게 대학원생이 던진 질문이다. 라파누이는 태평양에 있는 화산섬 이스터 섬을 뜻하는 이스터 섬 주민들의 단어이다.

숲을 파괴해 600여개 이상의 거대한 석상‘모아이’을 만들어 문명의 파멸을 초래한 비극의 섬이다. 교수는 즉답 대신 답변을 미루고 다음시간에‘풍경 기억상실’이라는 화두를 꺼낸다.

“마지막 나무를 자르기 한참 전부터 이미 라파누이는 황량했고, 그래서 아마도 별 생각 없이 잘랐을 것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생리학, 조류 생태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문화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이다.

그는 1998년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과 영국의 과학출판상을 수상한 책 <총,균,쇠>로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답변에서 라파누이 문명이 파멸한 진짜 원인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섬의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숲을 기억하는 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집단 풍경 기억상실쯤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하는 이가 없었기에, 그 숲이 사라짐을 아쉬워하는 이도 슬퍼하는 이도 없었고 그리하여 그 숲을 지키고자하는 의지를 가진 이도 없었던 것이다.

라파누이 숲의 원형을 기억하거나 숲의 변화를 읽어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숲은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고, 라파누이 문명은 오래도록 그 맥을 이어왔을지도 모른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다양한 숲 체험을 진행했고, 올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 중순 그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자꾸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더불어 숲 해설가 공부를 하던 2년 전 이맘 때 쯤, 나의 고민들도 떠오른다. 그때‘도코로지스트로서의 숲 해설가’, 즉 지역생태활동가로서의 숲 해설가는 어떨까하는 고민을 했다. 물론 이런 용어가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붙여본 말이다.

‘도코로지스트’는 학술적 용어나 범지구적 생태활동가들이 함께 사용하는 말은 아니고, 일본지역생태활동가들 사이에서 자리 잡고 있는 명칭이다. 일명‘장소전문가’라는 의미로 읽힌다. 도코로지스트의 우선 조건은 하나의 장소를 다양한 시선과 방법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장소(공간)의 가치를 설득해낼 수 있다.

사람들이 지역의 크고 작은 숲과 도시공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런 생태공간과 정서적 심리적으로 삶이 연결될 때 비로소, 훼손 없는 숲의 보전이든 막개발 대신 어쩔 수 없이 차선으로써의 합리적 이용을 선택하든 자신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것이‘도코로지스트’로서의 숲 해설가가 아닐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참여를 유도해 지역민 대상 밀착 숲 해설을 통해 지역민의 생태 감수성을 높인다면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활동가로서의 환경운동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담당할 수 있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막, 숲이라는 세계를 공부하는 학생답게 나름 의미 있는 큰 그림을 그리며 설레기도 했고, 너무 거창한 그림에 혼자 괜히 겸연쩍어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는 작년과 달리 학생 대상 연속성 수업을 학교, 마을, 하천, 백운산 등 곳곳에서 진행하면서 2년 전 멋모르던 시절 그리던 그림과 재러드 다이아몬드의‘풍경 기억상실’현상을 자꾸 겹쳐 떠올리게 된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바로 사람들이 크고 작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다양한 숲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숲도 역사의 진실처럼 기억할 때 지켜진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숲의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이 일을 하는 내내 품고 가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