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들이 그곳에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본다 야생동물과 마주하기 [아홉 번째 이야기]
[기고] 그들이 그곳에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본다 야생동물과 마주하기 [아홉 번째 이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1.01.15 17:23
  • 호수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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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겨울 백운산을 만나러 정상까지 가리라 마음먹고 나선 길. 나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미래의 나뭇가지, 잎, 꽃이 될 나무의 겨울눈에 빠져 발걸음이 늦어지는 사이 자꾸 시간은 흐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나무의 겨울눈을 애써 외면하고 속도를 낸다.

그런데 낙엽을 밟고 걸어가는 제법 묵직한 동물의 발자국 소리. 염소다. 그것도 2마리다.

생각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이미 발이 염소를 쫓아 걷고 있다. 녀석들이 멈추면 나도 멈추고, 녀석들이 걸으면 나도 걷는다. 녀석들은 나와의 거리를 확인하면서 먹이활동을 하느라 열심이다. 가끔은 멈춰 서서 제법 오랫동안 나를 응시한다. 녀석들의 속도에 맞춰 그저 따라만 다니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뭐에 홀린 듯 등산로를 벗어나 녀석들을 따라가며 사진을 찍다가 시간을 보니 40여 분이 흘렀다.

흐려지는 하늘에 겁이 나서 따라가기를 멈추고 뒤돌아선다. 등산로를 찾아 되돌아가는 길은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길을 잃어서가 아니다. 염소를 쫓아가는 동안은 오직 녀석들만 보였다. 그런데 되돌아가는 길에는 미처 보지 못한 녀석들의 흔적이 보였다. 그 흔적을 또 아무 생각 없이 쫓다보니 시간은 또 그렇게 흘렀다.

녀석들과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다 녀석들을 제법 알게 된다.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동안 다양한 낙엽을 입맛대로 골라 먹는다. 특히 참나무 낙엽을 즐겨 먹는다. 키 작은 나무의 겨울눈을 잘라 먹고, 나무껍질도 벗겨 먹는다. 오늘 본 녀석들은 사람주나무의 껍질만 골라서 벗겨 먹었다. 주변 다른 나무들보다 먹을 만 했나 보다.

녀석들은 무엇이 급한지 이동하면서 먹고, 또 그렇게 이동하면서 똥을 싼다. 먹이의 종류에 따라 똥 색깔이 좀 다르다. 발견한 똥은 갈색, 흑갈색의 똥이었는데, 흑갈색의 똥이 더 광이 났다. 아마도 겨울눈이나 조릿대 같이 수분이 좀 더 많은 먹이를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녀석들의 흔적을 쫓다가 멧돼지가 싸고 간 똥도 발견한다. 똥을 싼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하얀 곰팡이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근처 조릿대 숲에 잠자리도 만들었을 법한데, 거기까진 엄두가 안 나서 다음으로 미루고 돌아선다.

올 겨울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 길 없는 숲을 종종 헤매고 다닌다. 숲마루 선생님들과 지리산 야생동물 전문가를 길라잡이 삼아서 야생동물 흔적 찾기를 한 뒤로 생긴 버릇이다.

가야산에서 고라니가 만들어 놓은 길과 잠자리 흔적을 쫓아 숲길을 헤맸고, 그 산에서 작년부터 유심히 지켜보던 똥돌 위의 똥이 담비의 똥임을 확인한 뒤로는 담비를 보기 위해 종종 똥돌 주변 산길을 찾기도 한다. 국사봉 자락에서는 설치류를 먹고 싼 삵의 똥과 야생열매와 말벌을 먹고 싼 담비의 똥을 발견했다. 늦가을 백운산 정상에서 한재로 내려오는 길에서도 다래 먹고 싼 담비의 똥을 찾은 적이 있다.

지리산에 다녀온 뒤로 거짓말처럼 가는 곳마다 야생동물의 흔적이 보인다. 작년에는 황량한 겨울 숲에서 나무의 개성과 겨울눈의 신비에 감동했다면, 올 겨울 숲에서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야생동물의 존재를 알아보고 있다.

2년 동안 온전히 숲에 몰입하며 다양한 식물과 곤충, 새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제 네 발 달린 야생동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숲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숲의 주인이 아님을 진심으로 알고, 소유권을 버릴 때, 숲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더 많이 상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