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생활의 향기
  • 광양뉴스
  • 승인 2021.01.22 17:45
  • 호수 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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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시인·소설가

걷는 행복

 

아침 6시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나는 밖으로 나간다. 걷는 것과 함께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달려오는 새로운 순간들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만든다.

숨 가쁘게 뛰어다니며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던 예전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신비의 세계를 만난 듯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발걸음에 힘을 주고, 긴장된 근육을 푼다. 산들바람을 타고 달려오는 갯내음이 코끝을 타고 흘러들어오면서 몸을 새털처럼 가볍게 만든다.

잘 가꾸어진 주택단지 안의 해안도로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온종일 집안에 종잇장처럼 드러누워 있을 때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생기나는 모습들이다. 마스크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들의 얼굴은 모두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음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참을 걷다보면 바다 위로 붉은 태양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눈부신 빛들이 내 얼굴 위에까지 달려와 향연을 벌인다.

나는 모자를 벗고 눈만 남기고 다 가렸던 얼굴을 들고 그 빛들의 축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손톱만큼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 동굴 안에 오래 갇혀 지내던 죄수처럼, 가슴 벅찬 희열을 느낀다. 나는 사방으로 눈을 돌리며 푸른 숲속의 속삭임을 듣고, 바다의 노래를 듣는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우내 언 땅 속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다. 죽은 것 같았던 가지에 꽃망울이 맺히고, 눈부신 꽃잎이 피어날 것이다. 찬란하게 낙화하는 눈부신 설렘도 대지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아침을 알리는 새들의 행복한 지저귐 소리도 가슴 콩닥이며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에서 아침 짓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굴뚝에서 연기는 나지 않지만 골뱅이 삶는 냄새도 함께 날아온다.

7시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오르는 골뱅이 삶는 냄새는 나의 추억을 불러들인다. 심장을 뛰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골뱅이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물에 한두 마리 골뱅이가 걸려오는 날이면 그것이 먹고 싶어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나를 보고 웃으시며, 밥 짓는 아궁이 속에 넣고 구워주셨다. 감자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삶아 먹는 것보다 구워 먹는 것이 더 맛있다. 골뱅이도 예외는 아니다. 숯불 위에서 자글거리는 거품을 뿜어내며 익어가는 바다 냄새나는 골뱅이의 향긋한 맛에 난 늘 매료되곤 했다.

해안도로를 걷다가 골뱅이 익어가는 냄새가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오른다. 행복해진다. 현재의 고달픈 내 삶을 잊어버리고, 꿈을 꾸고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던 어촌의 작은 소녀로 돌아간다. 엄마의 사랑스런 막내딸이 된다.

걷다보면 그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 온종일 방안에 갇혀 세상과 단절한 채 콩벌레처럼 웅크렸던 나의 모습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 위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처럼, 벅차고 설레는 기쁨과 행복을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참을 걷는데 친구가 전화를 했다. 가야산에 청매화가 피었다고. 사진을 보냈으니 보라고. 매화 마을에도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했다고.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아, 정말 봄이 오고 있구나.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려도 자연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구나.

기쁨에 벅찬 발걸음이 힘차게 앞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