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
  • 광양뉴스
  • 승인 2021.02.26 17:16
  • 호수 89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실체와 흔적 사이 <열 번째 이야기>

 

한동안 완전 멘붕 상태에 놓였다가 이제 평정심을 찾았다. 실체와 흔적 사이,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야생동물에 눈뜨기 시작하고 두 달 동안 가는 곳마다 야생동물의 흔적이 보였다. 그 흔적을 따라 길 없는 산길을 헤매고 다니면서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수달똥, 담비똥, 삵똥, 고라니똥, 멧돼지똥, 야생 염소똥, 새똥, 새들이 뱉어낸 토사물인 펠렛으로 추정되는 물질, 숱하게 보이는 동물길까지. 바다, 하천, 산을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발견됐다.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종인 수달(1급), 삵과 담비(2급)는 고산 지대에서 저지대, 해안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런데 난 그 동물들이 주로 인적이 드문 계곡이나 높은 산에서만 살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달쯤 신나서 흔적을 쫓다가 여우, 늑대, 호랑이가 사라져버린 우리 숲의 최상위 포식자인 수달, 담비, 삵의 활동영역이 인간의 영역과 생각보다 많이 겹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졌다. 녀석들의 활동 영역이 인간의 영역과 많이 겹친다면 개, 고양이의 활동 영역과도 겹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본 똥들이 정말 수달, 삵, 담비의 똥이 맞는 걸까?

귀한 대접 받으며 사료만 먹고 사는 개, 고양이의 똥이야 야생동물의 똥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도시 길고양이나 유기견, 시골에서 막 먹고 막 자라는 개와 고양이가 싼 똥은 야생동물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할 텐데, 나 같은 초보자가 그걸 구별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똥을 싼 뒤 언제나 흙으로 덮는 것도 아닌데. 바다와 하천에서 발견한 수달똥은 바다와 하천에 살고 있는 물새의 토사물인 펠렛과 어떻게 다른 거지? 새똥이야 암모니아가 요산 형태로 배출되기 때문에 흰색이 섞여서 알아본다지만 위까지만 갔다가 입으로 토해내는 펠렛은 다르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하는 짓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 아닐까?

초기에 발견한 다양한 유형의 똥들은 녀석들의 똥이 맞다는 전문가의 확인을 받았지만 그 역시 의심스러웠다.

사진으로 동정한 것이기에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혹시 그 잘못된 판단을 근거로 한 나의 동정에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란은 커졌다.

그 혼란이 똥만 보면 막대기를 들고 헤집어 보는 습관을 만들었다.

똥의 모양, 색깔, 먹이, 질감의 미세한 차이를 확인하는 반복되는 수차례의 실재 작업만이 똥을 싼 야생동물의 실체에 접근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야생동물전문가 선생님에게 전화해 답답한데 하소연할 데가 없다며 푸념을 늘어났다.‘나도 그런 적 있었지’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내 답답함을 이해하려니 하는 그저 나만의 생각으로 늘어놓은 푸념인데, 그러고 나니 좀 편해지긴 했다. 야생동물을 이해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성가신 작업인지 알면서도 외면하지는 못할 것 같다.

숲에 입문하고 얼마 전까지는 실체를 만나 그 실체를 관찰하다 보면 앎이 생기고, 그 앎이 이해를 동반하고, 그러다보면 그 존재들과 교감이 이루어졌다. 나무와 풀이 그랬고, 육서곤충과 수서곤충 역시 그랬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새가 관찰이 어려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새가 나타나면 나를 풍경의 일부로 착각하도록 하염없이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된다. 그럼, 대체로 경계심이 느슨해진 새들이 내 주변에서 놀게 된다. 그때 남부지역에서 흔하게 관찰되는 텃새와 철새의 동정 포인트를 도감에서 미리 확인해 뒀다가 관찰하면 된다. 얼마 전까지는 이렇게 흔적이 아니라 실체와 대면하며 알아가고 이해하고 교감했다.

그런데 야생동물은 실체와 맞닥뜨리기도 어렵지만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흔적으로 그들을 더듬어 알아가고 이해하고 교감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성가신 일인가.

그럼에도 야생동물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흥미롭고 그럴수록 숲의 충만함은 더해지기에 멈출 수가 없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가다보면 조금씩 야생동물의 실체와 가까워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