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생활의 향기
  • 광양뉴스
  • 승인 2021.03.12 16:53
  • 호수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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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시인·소설가

나의 꿈을 위하여

밖에 나갈 일이 없다보니 집안을 살피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거실에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니 정리할 것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손도 대지 않았던 집안의 물건들이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봄 햇살이 거실 안으로 따사롭게 스며들어오는 날,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짐들을 찾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창고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쓴 원고들이었다.

나는 잃어버렸던 보물을 찾은 듯 가슴을 두근거리며 습작노트와 원고 뭉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햇살과 바람을 쏘이지 못한 종이들은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나는 위생휴지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닦았다. 그리고 햇살 속에 펼쳐 놓았다. 종이 속 글씨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찾았느냐고 원망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원고지 317매가 되는 소설도 있었다. 생각난다. 그 순간들이 낱낱이 다 기억난다. 그 때가 스물일곱 살 때였고,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날아다니는 이야기들을 잡아두지 않으면 모두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년생으로 낳은 두 아이를 등에 업고, 앞에 안고, 펜에 잉크를 찍어서 원고지를 메꿔 나갔다.

밤에 잠을 자지 않았던 딸이 그날은 한 번도 깨지 않아서 옆에다 살며시 뉘여 놓고 밤을 꼬박 새워서 중편 하나를 완성 시켰다. 그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후로는 쓰고 싶을 때 원고지를 앞에 놓으면 단편 하나가 완성되었다. 펜대를 잡은 손가락이 마비가 되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원고지에만 썼던 소설이 열편이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것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날의 시간들이 오롯이 달려왔다. 오래된 잉크냄새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때는 생각했다. 먼 훗날 정말로 소설가가 되면 그것들을 가지고 멋지게 만들어 봐야지, 하고. 그런데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가.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글 쓰는 것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살아오면서 나는 바닥을 친 때가 많았다. 배한봉 시인의‘육탁’이라는 시를 읽고 많이 울었던 적이 있다.

새벽 어판장에서 바닥을 치며 몸부림치는 물고기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절망을 느끼지 않겠지, 이게 마지막이겠지, 했는데도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겠다고 야무진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것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주었다. 나는 그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며 펜에 잉크를 찍어 원고지 위를 달려 나갈 때는, 꿈이 정말 꿈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안개 속 신기루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내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모한 줄 알았지만 간신히 잡은 채 버티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30년이 넘도록 종이 박스 속에 갇혀 창고 속에서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애를 태웠을, 20대의 내 꿈에게 이제 옷을 입혀주고 싶다.

눈부신 햇살 속으로 걸어 나오게 해주고 싶다. 암울함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었을 나의 20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때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결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