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의미 있는 돌 하나 놓고 간다
[들꽃산책] 의미 있는 돌 하나 놓고 간다
  • 광양뉴스
  • 승인 2021.04.16 17:26
  • 호수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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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명
순천제일대학교 교수

학교에서 이번 학기에『교육철학 및 교육사』라는 교과목을 수업하고 있다. 수업 준비를 위해 참고 서적들을 읽으면서 대동법을 주창한 개혁사상가, 김육 이라는 분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대동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이다. 당시 백성이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전세, 역, 공납이다. 이 중 문제는 공납이었다. 공납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공납은 큰 부담이었다.

예를 들면 광양매실이 특산물이라면 어느 마을에 매실 100상자 하는 식으로 할당량이 있었다. 매화나무에 매실이 열리기 시작하면 관리들이 찾아온다. 아직 콩알만 한 매실을 모조리 세어서 나중에 몇 개를 제출하라고 미리 정해준다. 여러 가지 기후조건 등으로 인해 수확량이 적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주지 않았다. 백성들이 공납 때문에 괴로워하니 수수료를 받고 공납을 대신 내주는 대행업자도 등장하게 된다. 얼마나 백성들의 삶이 고통스러웠겠는가?

대동법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었다. 쌀로 세금을 내자는 것이다.

대동법이 혁명적이었던 건 토지에 부과된 세금이라는 점이다.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는 것이라 누구나 다 내는 것이었다면 대동법은 토지 한 결마다 세금이 매겨져 땅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였다.

토지가 없거나 적게 소유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는 감세인 반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에게는 증세였던 셈이다.

이 법안이 시행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권력 있는 자,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통과시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만 대동법을 시행한다.

경기도에서만 시행되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무려 100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바로 김육이다. 김육은 10대에 임진왜란, 20대에 성균관 유생으로서 투쟁, 30대에 귀농, 40대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제대로 정치 생활을 시작한 건 50대였다.

천신만고 끝에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된다.

소위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김육은 이렇게 답한다.“나는 학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좋다.”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데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성리학,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 살면 최고지! 이것이 바로 그의 사상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라도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김육은 또 상소를 올리기 시작한다. 최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시행되면 전국 시행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양반들 입장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린다. 자기가 죽으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고 고백한다. 이제 병들어 곧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하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난다.

효종은“허황된 말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정책을 밀고 나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육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고 했다.

일생을 바쳐 대동법의 전국 시행을 외치며 몸소 실천한 김육. 이 시대에 김육과 같은 인물을 키워내는 교육을 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를 고민해보고 뜻을 세우는 것이다. 한 평생 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