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무의 품격이 만드는 숲의 아름다움 백운산, 진틀 병암산장~가마터 [열세 번째 이야기]
[기고] 나무의 품격이 만드는 숲의 아름다움 백운산, 진틀 병암산장~가마터 [열세 번째 이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1.05.14 16:31
  • 호수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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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내가 나무를 보면서 처음으로 품격이라는 말을 떠올린 것이 바로 옥룡 병암산장에서 가마터까지 이어진 돌바닥 길을 걸으면서였다.

아직 다른 지역의 다양한 산과 전국 곳곳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의 멋스러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나무의 품격하면 떠오르는 곳이 바로 그 구간의 나무들이다.

병암산장 주차장에는 아주 오래된 눈길을 끄는 산수유가 있다. 바닥에서부터 줄기가 갈라져 나오는 관목처럼 줄기가 뿌리 바로 위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올라오고 줄기가 서로의 빈틈 사이로 꽈배기처럼 꼬여 자라면서 잔가지를 내며 자란다.

한 그루인데 마치 여러 그루의 산수유가 빈틈을 찾아 줄기를 꼬아가며 서로를 의지하여 자라온 것 같은 모습이다. 한 그루 산수유가 여러 그루인양 여러 개의 줄기를 내어 빈틈을 찾아 비비꼬여 자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야 오죽 할까 싶으면서도 숨은 사연이야 어쨌든 내 눈에 드러난 나무의 모습은 멋지다. 그 산수유 앞에 서면 한 그루 나무가 그 자체로 풍경이 될 수 있음이 느껴진다.

병암산장을 벗어나 산길을 막 오르면 보이는 나무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봄에 황백색 꽃과 향으로 곤충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유혹하는 오래된 커다란 보리수나무와 백운산을 찾은 모든 이를 품어줄 것 같은 엄청난 폭의 수관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소나무. 두 나무가 살아온 시간이 그 나무의 자람새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오래된 보리수나무에 핀 꽃과 그 꽃을 찾은 나비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크다.

서어나무와 당단풍나무는 두 나무의 줄기를 딱 붙여 한 몸처럼 의지해 계곡 절벽에 버티고 서 있다. 움켜잡을 흙이 부족한데 옆에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있으니 너 죽고 나 살자고 싸우다가는 둘 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살고 너도 함께 사는 방법을 찾자고 의견 합의를 이룬 것이 아닐까.

노각나무는 넓은 바위와 주변의 나무를 피해 자라다 보니 뿌리인지 줄기인지 모를 밑동을 넓고 두툼하게 만들어 지지대로 삼은 뒤 빈틈을 찾아 줄기를 위로 곧추세우고 자란 모습이 마치 계곡 물속으로 기어들어가려는 거북이 엇비슷한 모습이 됐다. 그 모습이 대견해서 바라보고 때론 쓸데없는 상상 때문에 바라보게 된다.

본격적인 바위산 돌바닥길이 나타나면 그때부터는 또 다른 나무들이 시선을 잡는다. 바위투성이 산에서는 바위라는 장애물을 피해가며 부족한 흙을 부여잡고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궁여지책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는 흙 위로 다양한 모양의 버팀 뿌리를 지상에 만들거나 이도 안 되면 아예 뿌리로 바위를 끌어안으며 커다란 나무의 줄기를 지탱하며 서 있는 나무들도 많다.

어떤 나무의 뿌리는 무사히 지하 흙속에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했으나 열심히 성장하던 줄기가 거대한 바위를 만나자 아예 줄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바위에 찰싹 붙어 줄기로 바위를 껴안고 위기를 돌파한다. 참 놀라운 적응력이다. 어떤 나무는 가볍게 껴안는 수준에서 합의하고, 어떤 나무는 합의가 잘 안 됐는지 바위가 줄기 깊숙이 파고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합의를 마친 경우도 보인다.

그런데 4월 초에 하얀 꽃을 피우는 매화말발도리는 완벽한 협상가인 듯하다. 아예 흙을 포기하고 바위 위에 터를 잡고 군락을 이루며 산다. 큰 키를 포기하고 보통 1미터도 훨씬 안 되는 작은 키를 선택해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을 한 조상 덕에 오히려 경쟁자 없이 바위 위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병암산장에서 가마터 구간 나무들은 하나 같이 바위라는 장애물을 안고 그 장애물과 타협하거나 정면으로 돌파하며 살다보니 환경이 좋은 곳에 사는 같은 종의 나무들에 비하면 비정상적인 뿌리와 줄기를 만들며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그 바위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숲이 묘하게 아름답다. 그런 숲을 만들어 내는 나무에게 품격이란 수식어는 잘 어울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