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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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21.06.18 17:31
  • 호수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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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시인·소설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딸로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래서 6월이 오면 곳곳에서‘호국보훈’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플래카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다치거나, 돌아가신 분들의 고귀한 생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나는 남다른 감회로 그 플래카드를 바라보고, 설레는 가슴으로 6월을 맞는다. 아버지가 바로 국가유공자이시고, 나는 유공자의 딸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여름방학이 되면 열흘씩 봉사활동을 다녔다. 포항시내에 있는 학생들 중 국가유공자 자녀들은 모두 모여서 하는 연례 행사였다.

학교가 달라 처음 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금방 친해지고 피붙이처럼 가까워지곤 했다.

주로 산과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는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내가 국가유공자 딸이라는 사실에 더없이 큰 자부심을 느꼈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피의 고지라고 불렸던 백마고지에서 싸우다 다치셨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그것은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했다.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왼쪽 손바닥에 총알을 맞았고, 총알은 아버지의 손바닥을 관통했다.

지금 94세인 아버지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환자처럼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하지만 백마고지 이야기가 나오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빛을 발한다.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보다는 오직 백마고지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적과 맞섰다고 하셨다.

방금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전우가, 적의 총탄에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볼 때는 무서운 것도 없으셨단다. 무조건 일어서서 적을 향해 총탄을 쏘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머리맡에 국가유공자 수가 새겨진 모자를 놓고, 외출할 때마다 그것을 쓰고, 유공자 표시가 있는 조끼를 입으신다.

아버지는 젊은 날,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장을 누비며 다녔던 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날들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쇠락해지셨지만,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것이리라.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던 그날들이 지금의 아버지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리라.

나는 아버지가 온종일 거실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린다. 그런 아버지에게 좀 더 살갑게 다가가지 못하는 내 성격이 못마땅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하게 채워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하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끼니때마다 식탁으로 걸어오시는 것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내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또렷하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해드릴 것은,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래서 많이 죄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올 6월은 유난히도 신록이 무르익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