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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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21.08.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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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나는, 널 누구로 기억해야 하는 걸까 <열 여섯번째 이야기>

아침밥을 먹기 전 그대로임을 확인한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기 전에 다시 확인한다. 이런 그새를 참지 못하고 깨어나 사방을 날아다니며 탈출구를 찾고 있다. 정확한 종명은 모르겠지만 기생벌 종류다.

녀석이 빠져나온 애벌레의 몸은 남은 것 하나 없이 텅 비어있다. 자신의 몸과 시간을 모두 기생벌에게 뺏긴 애벌레의 텅 빈 몸, 짧은 삶을 좀비로 살다간 이 애벌레의 정체성은 뭘까? 나방? 기생벌? 나방 애벌레로 태어났으나 옛 몸을 버리고 새롭게 탄생한 성충의 몸은 기생벌이다. 우리 집에서 15일을 함께 살다 떠난 이 생명을 나는 누구로 기억해야 하는 걸까?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방부전나비가 괭이밥 잎 뒷면에 알을 낳는 것을 보고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그런데 며칠 동안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다싶어 알을 데려왔다. 여러 개의 알 중에 2개만 선택하고 일어서다가 괭이밥 잎을 말고 먹이 활동 중인 애벌레가 보여서‘그럼, 너도 따라 갈래’하고 무심결에 우리 집에 강제 입주를 시켰다. 그런데 덤으로 딸려온 녀석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슬픈 주인공...

덤으로 데려온 녀석이 얼마나 소심한지 잎말이 속에 숨어서 똥가루를 내보내“나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생사확인을 해준다. 내 새끼 손톱만한 작은 잎을 말고 숨어 있어서 억지로 잎을 펼치다가는 녀석이 눌려 죽을 테니, 스스로 몸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싱싱한 괭이밥을 놔주면 어느 새 몰래 넘어와서는 잎을 말아 또 숨었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온지 6일째 되던 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4~5mm밖에 안 되는 살구색 작은 몸에 온통 실 같은 돌기를 촘촘히 달고 있었다.

“온몸에 촘촘한 돌기를 달고 잎까지 마는 이중 안전장치를 하며 사느라 고생했다. 이제 세상에 너를 드러내도 될 정도로 자신감이 생긴 거니? 다행이다. 한집살이 한지도 제법 됐으니 눈인사는 하고 살자.”

그렇게 눈인사를 나눈 지 이틀째 되던 날 녀석이 몰래 허물을 벗었는지 살구 색에 가깝던 몸이 노란색으로 변했다.

다음날에는 애벌레도 번데기도 아닌 이상한 몸으로 변했다.

노랗던 몸은 연한 살구 색으로 돌아갔는데, 길쭉하고 둥글던 몸이 번데기처럼 딱딱해 보이는 반달 모양으로 다소 부풀어서 돌기가 유난히 돌출되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워낙 작아서 반달 모양의 옆모습이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이때부터 녀석이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이미 기생 당한 상태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틀 뒤부터는 머리와 배 끝부분에 검은 색이 드러나고 3~4일 동안 검은색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애벌레의 몸에서 기생벌류가 우화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생벌이 숙주 애벌레의 몸 안에서 알, 애벌레, 번데기 전 과정을 살다 나왔다면... 도대체 숙주 애벌레는 누구의 삶을 산걸까.

숙주 애벌레가 말던 잎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온 건 자신감이 아니라 이제 번데기가 되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기생벌의 계획이었던 걸까? 기생벌이 번데기를 만들기 위해 숙주 애벌레의 몸을 완전히 먹어 치우고, 텅 빈 몸을 번데기방인 고치 삼아 그 안에서 안전하게 번데기를 만들고 약 5일쯤 후 날개를 달고 성충이 되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계획.

7월 초부터 불가 한 달하고 일주일 만에 우리집살이를 함께한 곤충 중에 기생곤충이 4종 11개체나 된다. 깨알보다 작은 먹그림나비 알에서 티끌만한 기생벌 성충이 3마리나 나오는가 하면, 푸른큰수리팔랑나비 애벌레의 외부에서 기생한 기생벌 2마리, 으름큰나방 애벌레의 몸속에서 기생하다가 으름큰나방 애벌레가 번데기를 만든 4일 후에야 으름큰나방의 번데기를 뚫고 나와 번데기를 만들고 우화를 기다리는 정체불명 기생곤충 5마리까지.

기생은 곤충의 세계에서 흔한 현상이고, 자연이 스스로 통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곤충전문가 선생님의 말을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하지만 숙주 애벌레에게 감정이입하며 길렀기에 감정적으로 냉정해지기는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제 세상에 나온 기생벌의 탄생을 저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괭이밥이 많은 초지에 녀석을 놓아준다. 녀석은 벼과식물의 축 늘어진 잎에 앉아 떠나지 않고, 난 작별 사진을 찍어준다.

“넌 이대로 살아남아 짝을 만나고 산란에 성공한다면 너의 집계 후예를 남기게 될 테지. 그리고 또 다른 기생의 삶이 이어질 테고. 다음에 내가 너희 종족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본다면 너희 종족의 모습에서 숙주인 나방 애벌레가 먼저 떠오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