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①
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①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1.10.12 08:30
  • 호수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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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인 채 말 못한‘광양의 아픔’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었다

지난 6월 역사적인‘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공동참여한 김승남, 주철현, 소병철, 김회재, 서동용 의원.

 

현대사의 비극인‘여순사건’은 73년 전부터 현재까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피해지역은 발생지인 여수를 지나 순천을 포함하고 광양시와 보성, 고흥, 구례군 등 전남동부지역을 아우른다. 나아가 전북과 경남 서부권도 피해지역에 포함될 정도다.

또 한국전쟁 직후 전국 형무소 재소자들의 무더기 총살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평가를 받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도 여순사건과 관련을 맺는다.

여순사건은 다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국가폭력의 원형으로 작용해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원인이 됐고, 이후 대한민국이 사실상의‘반공 국가’로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은 발생 73년만인 올해 6월 드디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첫 걸음을 시작했다. 국회는 지난 6월 29일‘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고통 속에 살아온 유가족들의 한도 풀리게 됐다. 아울러 20년간 견고하게 특별법을 막고 버티던 국회의 장벽도 허물어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국회는 이날 열린 본회의에서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 갑)이 대표발의하고 민주당 국회의원 150여명이 함께한‘여순사건 특별법’을 의결했다.

여순사건 발생부터 특별법 의결까지

여순사건은‘1948년 10월,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특별법안에 정의된다. 당시 희생자만 1만여명이 넘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1949년 11월 11일 호남신문 기사에는‘1949년 전라남도에서 총 3차례에 걸쳐 피해 조사를 실시했으며, 마지막 조사 시점인 1949년 10월 25일에는 무려 1만1131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직·간접적 원인이 되었던 제주 4·3사건은 지난 2000년에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4년부터는 국가 추념일로 지정돼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6·25 전쟁 전후 발생한 거창사건, 노근리 사건 또한 특별법을 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진행되고 있다.

반면 여수, 순천, 광양 등 전남권 전역에 1만여명의 주민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여순사건은 제16대 국회부터 제20대 국회까지 8차례 특별법안이 발의됐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2009년 1월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으로 순천 일대 민간인 438명이 군과 경찰에 집단 사살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후 2011년 10월께 여순사건 피해 유족들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론을 토대로 법원에 당시 군사법원 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게 된다.

2011년부터 2019년에 이르는 동안 순천지법과 광주고법은 이 사건의 재심을 결정했지만 검찰은 항고와 재항고를 통해 반발한다.

결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9년 3월 21일 여순사건의 재심 개시를 최종 결정했고, 같은 해 4월 2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합의부에서 첫 공판이 진행된다.

같은 해 12월 23일 검찰은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진 고 장환봉씨에게 무죄 선고 요청했고, 재판부는 여순사건 발생 72년만인 2020년 1월 20일 민간인 희생자인 고 장환봉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기에 이른다.

재심재판 무죄 선고 이후 유가족은 물론 유족회, 지역사회까지 여순사건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에 대해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고, 정치권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21대 국회에 진출한 전남 동부권 의원 5명(소병철, 주철현, 김회재, 서동용, 김승남)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뜻을 같이하고 2020년 7월 28일 소병철 의원 대표발의 형식으로 특별법을 발의했다.

특별법안은 올해 2월 22일 행안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처음 상정된 이후 2달 만에 여당 단독으로 처리됐으나 같은 해 5월 12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반대로 안건 상정이 무산됐다.

각고의 과정을 거쳐 특별법안은 6월 16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를 통과했고 6월 25일에는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국회는 6월 29일 본회의를 열어 출석 231명 중 찬성 225명, 반대 1명, 기권 5명으로 역사적인 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의 의미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대해 여순사건을 연구해온 학자를 비롯해 유족회, 정치권은 한 목소리로 순천·여수를 넘어 전남, 전북, 경남 지역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진실규명, 피해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여순사건 연구가이자‘역사공간 벗’대표연구원인 주철희 박사는“여순사건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만큼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과 여파가 컸다”며“이번에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길이 열린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여순사건은 대통령에게 통수권이 있고, 국가가 관리하는 권력조직인 군대에 의해 촉발됐다”며“그동안 국가는 반란의 모든 책임을 지역민에게 전가하면서 책임을 회피해왔기에 특별법 제정은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평가했다.

이규종 여순항쟁유족연합회장(구례유족회장)은“특별법 제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차별과 반목의 시선을 해소하고 종식시키는 의미를 가진다”며“이번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들과 유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면 그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정운 기자

[여순 10·19 사건 특별법 제정까지]

△1948년 4월 3일 = 제주서 남로당 제주도당 등 350명 무장봉기

△1948년 10월 19일 =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2000여명, 제주 4·3사건 진압하라는 출동명령 거부

△10월 21일 = 14연대 군인들이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 등을 점령. 이승만정부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 선포

△10월 23일 = 진압군, 순천 장악 후 여수 탈환 작전 개시.

△10월 27일 = 진압군, 여수 완전히 장악하며 여순사건 종료

△12월 1일 =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

△1950년 10월까지 =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반군 협력자 색출'을 이유로 2년간 전남과 전북, 경상도 지역 좌우익 인사와 무고한 민간인들 군경에 의해 희생

△2001년 = 여순사건유족연합회 출범(여수·순천·구례)

△2001년 = 김충조 민주당 국회의원이 16대 국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 최초 발의

△2005년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수정안 국회통과

△2009년 1월8일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여순사건으로 순천 일대 민간인 438명 군과 경찰에 집단 사살됐다고 결론

△2011년 = 김충조 의원 18대 국회서 여순사건 특별법 2차 발의

△2011년 10월 = 여순사건 피해 유족들 과거사정리위원회 결론 토대로 법원에 당시 군사법원 재판재심 청구

△2013~2019년 = 김성곤, 정인화, 이용주 의원, 윤소하, 주승용, 김성환 의원 등이 차례로 법안 발의했으나 이전 법안들처럼 자동 폐기

△3월 21일 =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심 청구 7년만에 여순사건 재심 개시 결정

△2020년 1월 20일 = 여순사건 72년만에 민간인 희생자 고 장환봉씨 재심재판 1심서 무죄 선고

△7월 28일 = 소병철 의원, 여순사건 특별법 대표발의…전남 동부권 의원 5명 공동 준비

△6월 29일 = 국회 본회의서 출석 231명 중 찬성 225명, 반대 1명, 기권 5명으로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