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⑤] 빨치산 짐 날라줬다고, 군인·경찰에 희생, 식량 약탈에 반항한다고, 빨치산에 학살 당해
[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⑤] 빨치산 짐 날라줬다고, 군인·경찰에 희생, 식량 약탈에 반항한다고, 빨치산에 학살 당해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1.11.05 15:54
  • 호수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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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곡면 묵백리·수평리서, 민간인 다수 학살

진상면 어치·섬거리 장성뱅이서, 주민 피해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피해 적은 진월면

지난 6월 역사적인‘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옥곡면

옥곡면의 민간인 희생자는 62명으로 전체 희생자 612명 증 10.1%를 차지한다.

유형별로는 역시 여순사건 관련이 가장 많은 32명이다. 시기적으로는 여순사건 시기와 한국전쟁 시기 모두 고르게 나타난다.

옥곡면의 주요사건으로는 1947년 5월 1일에 전개된 메이데이 시위로 인해 신금리 마을 주민 3명이 경찰에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백암 마을 주민 희생사건, 묵백리 사동마을 민간인 희생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옥곡면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로는 옛 옥곡지서, 옥곡면사무소, 묵백리 일원, 수평리 일원 등이다.

옥곡지서는 현재 사라지고 없으며 옥곡면사무소는 1951년 10월 20일 오후 9시 40분께 빨치산의 습격으로 소실된 적이 있으며, 현재는 옥곡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편입되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묵백리 민간인 희생지=현재 이곳은 변형된 형태로 마을이 남아있다. 위치는 옥곡면 묵백리 백암마을과 삼존마을, 점터마을이다.

이곳은 해방 이후부터 6·25한국전쟁 시기까지 옥곡면에서 민간인이 가장 많이 희생된 마을이다.

1948년 10월말, 백암마을 출신의 의사가 반란군으로 오인돼 순천도립병원 인근에서 학살되었고, 1949년 1월 11일 1949년 4월 21일, 1949년 9월 21일에 묵백리 주민 등이 광양읍 사곡리 죽림마을 솔티재 등에서 학살됐다.

또한 1950년 7월에도 묵백리 주민들이 구랑실재에서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수평리 민간인 희생지=이곳은 변형된 형태로 마을이 남아있다. 수평리는 해방 이후 6·25한국전쟁 시기까지 옥곡면에서 민간인이 가장 많이 희생된 마을로 알려졌다.

1948년 12월 20일 수평리 매남마을 주민이 빨치산의 짐을 날랐다는 이유로 옥곡지서에서 조사를 받고 인근에서 살해됐다.

1949년 1월 10일에는 옥곡면 수평리 수평마을 주민이 매남마을 뒷산에서 군인에 의해 희생됐다.

 

진상면

진상면의 민간인 희생자는 총 81명으로 전체 희생자 612명 중 13.2%를 차지하고, 사건 유형별로도 역시 여순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81명이 희생됐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6월부터 1950년 5월 사이에 피해가 집중된다.

진상면은 산세가 험했고, 특히 백운산 깊은 계곡을 낀 3개리는 군경의 진입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상면의 주요사건은 1949년 9월 29일 군경 자수자의 지목으로 느재마을에서 7명, 황죽리·지원리·비평리 주민 6명이 장성뱅이 모퉁이(섬거리 신시마을과 용계마을 경계)에서 각각 처형된 사건이 있다.

이 사건 외에도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다시 10월 10일에 3명 등 10월~11월 사이에 어치리와 황죽리, 비평리 등 3개리에서 군경에 희생된 이가 20명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빨치산 역시 이 시기에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경찰에 협조한 이들을 대상으로 살상을 저질렀다.

1949년 7월 비평리에서 구장 가족이라는 이유와 삼촌이 청년단 단장이라는 이유로 일가족 3명이 학살됐고, 식량 약탈에 반항한다는 이유로 일가족 3명 등이 희생당하는 등 15명이 변을 당했다.

진상면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로는 어치리 느재마을, 섬거리 신시마을과 용계마을 경계지역인 장성뱅이 등이 있다.

△어치리 느재마을=느재마을은 당시 구장이 좌익사상을 가져 젊은이 다수가 입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9월 29일 입산자 중 한명이 자수하면서 동조자를 손가락으로 지목, 마을회관 공터에서 7명의 주민이 집단 총살됐다.

△장성뱅이 민간인 희생지=이곳은 진상면 섬거리 신시마을과 용계마을 경계로, 현재 마을 형태 등이 변형됐다.

1949년 9월 구장 가족이라는 이유와 삼촌이 대한 청년단장이라는 이유로 일가족 3명이 희생됐다.

또 식량을 약탈해 가려하자 반항하며 경찰이 온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일가족 3명이 이곳에서 희생당했다.

 

진월면

진월면의 민간인 희생자는 총 50명으로 전체 희생자 612명 중 8.1%를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희생자가 적었던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는 백운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여순사건의 입산경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피해 시기 또한 타 지역과는 달리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후까지 균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진월면의 주요사건은 1949년 9월 경찰서가 습격 당한 후, 기존에 입산자와 관련이 있다거나 남로당 간부의 피난에 도움을 주었다고 지목된 이들이 희생됐다.

옥곡지서 습격을 빌미로 신구리 구동마을 7명, 오사리 사평마을 6명 등이 마을 인근에서 혹은 옥곡지서로 끌려가던 중 사살 당했다.

진월면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로는 진월지서, 오사리 사평마을, 신구리 구동마을 등이다.

△진월지서=진월면 선소리 선소중앙길 45번지로, 현재 진월우체국 건너편 터에 있었고 멸실된 상태다.

1949년 4월 20일 진월면 오사리 사평마을 주민이 좌익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돼 진월지서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1950년 12월에도 선소리 주민이 진월지서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오사리 민간인 희생지=진월면 오사리 사평마을에 위치하며 현재 건물과 마을 모습은 변형됐다.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하동군 남로당 간부의 피난처로 이용됐다.

1949년 1월 당시 사평마을 이장이 옥곡면에서 총살됐고, 1949년 9월 16일 빨치산이 광양경찰서를 비롯하여 옥곡지서 등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사평마을 주민 3~4명이 사평마을 뒷산에서 학살됐다.

1949년 5월 22일 당시 이장을 비롯해 주민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솔티재에서 학살됐으며 1949년 5월 27일 신구리 구동마을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게 오사리 추동마을 뒷산에서 희생됐다.

△신구리 민간인 의생지=이곳은 진월면 신구리 구동마을로,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및 고포리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마을이다.

여순사건 직후 구동마을에 위치한 금암골에서 좌익 사상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마을에 좌익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어서 군과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며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1949년 4월 13일경 신구리 주민들이 좌익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 진상면과 옥곡면의 경계지점인 수달피재에서 학살됐다.

이 외에도 신구리 주민들은 1949년 5월 27일 오사리 추동마을 뒷산에서, 1949년 10월 구동마을 인근에서 학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