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인생 여정의 소회… 조동래 전 광양전교
팔순 인생 여정의 소회… 조동래 전 광양전교
  • 김양환 기자
  • 승인 2021.11.05 15:59
  • 호수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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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있던 광양 역사•문화, 재조명 노력 ‘한 획’
고향발전•향토문화, 꽃피울 연구회 조직 ‘기대’

산수(傘壽)를 넘겨 북으로 달리는 철마에서 뒤돌아보는 그의 여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조동래 전 광양전교는 1939년 음력 7월 7일 광양시 옥곡면 장동리 12번지에서 아버지 조수제(趙壽濟)와 어머니 양봉아 사이에서 4남1녀 중 막둥이로 태어났다.

일제 때라 나라가 없으니 질서가 없고 절대빈곤 층이 많아 살기가 어려웠다. 환경이 그러하니 유아기와 청소년기에는 생의 존재가 뚜렷하지 못한 것은 위로 형님이 3명이나 있었기에 그 우산 밑에서 성장한 탓이다.

교육연령이 되니 옥곡초에 입학해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진학을 포기한 이유는 장형은 면사무소에 다녔지만 위로 두 형은 군대문제, 진학문제로 집에 없어 어린 그가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아버지는 생존해 계셨지만 나이가 연만해 노동력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소매장군을 졌고 모를 심기위해 무논 일을 했다.

그런 세월을 넘기는 동안 어린 조동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일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배우자 그리고 집을 나가자, 이것은 고향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공해 돌아오면 될 터’라고 마음을 정한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5년차 봄에 모아진 자금은 900원이었다. 식구들 몰래 중학교 교사인 일가 조모 선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장형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가게 됐다.

나이보다 늦게 진학한 탓에 초등학교 동창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어 외면해 버렸다. 다행히 초등학교 동창 두 사람이 같은 학년으로 입학했다. 이후 중학교를 마칠 무렵, 고등학교 진학은 입 밖에 낼 수 없었으나 몰래 순천농림학교에 응시해 합격했다. 하지만 합격증을 본 그의 어머니 얼굴이 흙색으로 변해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진상농고는 갈 수 있지만 순천은 안 된다”는 말에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교수가 되고 싶은 일은 가당찮은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어 상심하고 있을 때 농업협동조합대학이 설립돼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다음해 합격했다.

졸업 후 농촌진흥청에 임직으로 있다가 농촌지도사직 7급 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광양군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에서 10년간 근무하면서 결혼을 했다.

2세가 출산되고 자라니 교육문제와 자신의 신상문제로 고민 끝에 전매청으로 전직했고, 수원에 있는 경기지사를 거쳐 서울지사에서 정년을 했다.

자식은 1남 2녀를 뒀다. 큰 딸은 학사출신으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들은 박사학위를 취득해 한의사로 있고, 작은 딸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면서 연세대학교 석사를 마친 뒤 공부를 더한다며 교원교육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퇴직 후 일산노인복지관에 10여년을 출입하면서 복지관에서 발행하는 실버신문에 글을 쓴 연유로 일산 북부연합신문 사회부기자로 초·중학교 탐방 기사를 쓰면서 재경광양출신 14명의 신상에 관한 프로필을 광양 지역신문에 기고했다.

광양 역사·문화에 관심 갖다

조동래는 이 무렵이던 2002년 2월 월간 한맥문학에 수필로 등단한다. 2010년 봄 광양으로 귀향했고 역사문화관 해설사 모집에 신청해 교육을 받고 6년간 활동한다.

조 전 전교는 “이때 광양시 문화재 심사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진월면 차사리 안상선 고택을 지정문화재로 선정한 일과 광양시 도로지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초남 공단길 등 몇 곳의 지명을 명명한 것은 잊을 수가 없다”고 소회했다.

2013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요청으로 광양시에 있는 고서(40년 이상, 족보제외)를 찾아 영상을 보고하는 일에 한해 여름을 보냈다. 읍면에 산재해 있는 고서를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지연·학연을 총동원해 소장한 가정을 방문했다.

이때 함께 일한 신영식·황상보 사진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조 전 전교는 “목록을 작성하고 고서 소유와 그 내용을 상담해 문서화하고 사진기로 영상화하는 것인데 360여편의 고서에서 9600카트를 촬영해 보고했으니 영상은 영구 보존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이때 광양읍지를 찾은 것은 큰 소득이다. 읍지는 3명이 원본을 갖고 있다. 또한 광양현감을 지낸 어영담의 현창사업을 위해 남해안 7개 시군을 답사한 일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또한 광양의 인물인 김항원·이무방을 알았고, 대표적인 선비 신재 최산두·매천 황현은 물론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에서 윤동주 시 원본 19편이 소장돼 해방과 더불어 출간되었다는 사록을 보고 용정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와 종로구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을 보았고 누상동 하숙집까지 답사했다. 안타깝게도 윤동주는 본인이 저술한 책은 한권도 없다.

다만 정병욱 교수는 본인이 쓴 저서가 13권이나 돼 수집해 내용을 학습한 결과를 광양신문에 14회 기고했다. 신재 최산두에 관해 상세한 것은 소설조선의 선비(저자, 박혜강 진상출신)에 조광조와의 관계가 소상하게 상재돼 있다.

그는 “매천황현의 사적을 접하기 위해 구례매천기념사업회를 2회 방문, 저서와 여러 가지정보를 구득했던 것이 재산”이라며 “그러면서 짬을 붓도 잡아보고 2010년에 시로 등단해 시작노트를 곁에 두고 심고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역사문화관에서 함께 해설한 동지들을 어찌 잊겠냐며 평생의 좋은 추억으로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지인의 추천으로 광양향교에 입문해 신입생 27명과 함께 1년간 연수를 거쳐 정식유림이 된다. 향교는 근대화 이전에는 중등교육기관 수준이었고, 서당은 초등학교 수준이었다. 조 전 전교는 학습할 적당한 교재가 없다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연수기간 중 수강내용은 제례, 상례, 혼례가 중심이었으며 유교이념과 성균관 역사는 고문자로 엮어져 이해가 난해하니 교생들은 흥미를 갖지 못하는 폐단을 알았다.

해서 수련기간 동안 교생 모두의 뜻을 모아 대표 3명을 선발해 그들로 하여금 현대적 감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시기에 향교의 이념을 파악하고 나서 교화부장을 자청해 교생을 2년간 지도했고, 2017년 4월 1일 광양향교 제 55대 전교에 취임했다.

취임 후 매년 교생을 20명 내외로 모집해 교화함으로서 향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가르치는 교재는 그가 교화부장 때 자비로 만든 것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광양시장에게 요청해 지원을 받아 300부를 만들어 활용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도 흔치 않는 사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쉬움이라면 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고서와 서적을 잘 정리해야 오래 보존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데 여러 곳에 산만하게 진열돼 있어 독서실 겸 도서실을 100여 평 신축해 향토문화연구를 겸할 생각으로 추진했으나 완성치 못한 아쉬움이 가슴에 남아있다”고 아쉬워 했다.

이어 “향교는 앞으로 할일이 많다. 사회가 어지러우니 유교적 교육을 일정 부분 향교에서 시행하는 것이 교육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새로 입교하는 교생에게 목적과 이념에 맞는 교육을 이수케 하여 유림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함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2년 후 4월에 임기를 마친 8월, 조 전 전교는 전남 향교재단에서 감사를 맡아 달라는 요구가 있어 현재 직분을 갖고 있다.

조동래 전 전교는 “이제 무거운 짐을 벗었으니 고향발전과 향토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연구회가 조직돼, 광양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해 주시기를 소망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