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절부지의(竊鈇之疑) : 도끼를 훔쳐갔다고 의심하다
[고전칼럼] 절부지의(竊鈇之疑) : 도끼를 훔쳐갔다고 의심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21.12.24 16:41
  • 호수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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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사람을 보면서 공연한 의심을 할 때 쓰는 고사(故事)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의심은 갈수록 커진다.

서양에서는‘진리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의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친한 친구 집에 갔다가 술잔에 비친 뱀 그림자를 보고 자기를 해치려는 것이라고 혼자 의심하여 큰 병이 났다는 배궁사영(杯弓蛇影)이나, 하늘이 갑자기 무너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밥을 먹지 않는 쓸데없는 의심의 대명사 기인지우(杞人之憂) 즉 기우(杞憂)도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다. 집안에서 아무리 도끼를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웃집 청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의 걸음걸이를 보아도 도끼를 훔쳐간 것 같이 보이고, 말하는 것도 평소와는 다르게 왠지 도끼를 훔쳐간 것처럼 보였다.

오후에 다시 보았는데 안색이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아 더욱 도끼를 훔쳐간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며칠 후 그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전에 자기가 나무를 베던 곳을 지나가다가 도끼를 하나 발견했다. 그 도끼를 보니 자기가 잃어버린 도끼가 분명했다. 자기 손때 묻은 물건이라 무척 기뻤다.

나무를 한 짐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웃집 청년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성이며 돌아다니는데 길에서 마주쳤다.

청년의 모습은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항상 똑같았다. 그러나 이때는 도끼를 훔쳐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재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바뀐 것은 자기 마음뿐이다.

자기의 편견이 이웃집 청년을 도끼 훔친 자로 간주(看做)했기 때문에 도끼를 훔쳐간 사람으로 보였으나 도끼를 찾고 나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전국시대를 진시황(秦始皇)이 통일하고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혀갈 때 진시황의 생부로 알려진 여불위(呂不韋)가 학자들을 불러 만든《여씨춘추(呂氏春秋)》〈거우(去尤)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거우는 마음에 얽매여 있는 것을 제거 한다는 말이다.

마음 한구석에 쓸데없이 자라잡고 있는 말 못할 무엇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거우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타인이 바뀌는 것을 바라지 말고 내가 바뀌면 된다는 것을 강조 한다.

사람들은 누가 말을 하면 부질없이 불필요한 의심을 할 때가 많다.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괜히 그 말에 얽매어 일을 어그러지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중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즘에는 호불호(好不好)라고 한다. 왼쪽 방향을 보고 있는 자는 절대 오른쪽을 보지 못하고 남쪽방향을 등지고 북쪽 방향을 보고 있는 자는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도 자기 마음에 존재하는 무엇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을 현대정치판 에서는 극좌(極左)니 극우(極右)니 하는 정치인들을 말한다.

이런 정치인들은 대부분 자기의 주장을 지키려는 자만심(自慢心)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집(我執)에서 나온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주장했지만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면 잘못을 인정하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필요하다. 자존감을 스스로 깨닫고 잘못을 인정할 때 오히려 품위가 지켜지고 달리 보여 진다.

춘추시대 상돌이 부자(父子)가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저자거리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세상에서 우리 상돌이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돌이보다 더 못생긴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인식하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아들인 상돌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얽매임이 잘못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상돌이 부자 같은 사람들이 많다. 더구나 요즘은 자녀들이 많지 않아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다.

백 명이 발맞추어 행진하는데 어떤 아이가 발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걷고 있었다. 왼발과 오른발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교가 그 훈련병에게 발이 틀렸다고 지적하며 주의를 주자, 그 아이의 부모는 우리 아이 발이 맞고 아흔 아홉 명의 발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무리 우겨도 세상에는 참과 거짓이 존재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모든 것에 완벽(完璧)하지 못하고 틀 릴 수도 있다. 그런 때는 변명하기 보다는 그릇됨을 빨리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더 현명한 사람이 아닐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내 마음이 변해야 세상도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