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사이를 걷다] 그대의 거처는 행복하십니까?
[도시 사이를 걷다] 그대의 거처는 행복하십니까?
  • 광양뉴스
  • 승인 2022.03.04 17:17
  • 호수 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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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진
건축가(도시공학박사)
노성진공간연구소장

거처(居處)와 인사(人事)는 만물의 이치와 같이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높은 산이 있으면 반듯이 깊은 골이 있듯이 매우 상대적 관계인 보편적 가치로 굳혀진 것이 주거와 사람 사는 일일 것입니다.

고종 31년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저술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책의 첫 장에 성명론(性命論)에 천기(天機)와 인사(人事)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누구나 의사가 되어야 널리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자신의 저술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플랫폼(Platform)개념으로 하나의 모태가 만들어 지면 그것을 응용한 많은 새로운 창출이 일어난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의사들은 상당한 철학적 태도를 포함한 이 서적을 매우 중요하게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병이라는 것이 바늘 끝처럼 아픈 곳을 들어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마는 인간의 건강한 삶은 거처(居處)에서 비롯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거처가 분명하지 않으면 반듯이 건강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의 성명론(性命論)은 목숨, 즉 생명의 성질에는 인간의 거처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거처를 생명처럼 여기는 민족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산지 회귀본능이라고도 하는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생명을 생산했던 거처를 의미 할 것입니다.

거처가 없는 사람을 우리는 걸인(乞人)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민족정서로는 가장 두렵게 느끼는 보편적 가치일 것입니다.

걸(乞)자의 뜻은 ‘빌다’이다. ‘빌어먹다’는 말인 것이다. 집이 없으면 빌어먹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요!

이제마 선생은 성명론(性命論)에서 “人事가 有四하니 一曰居處오 二曰黨與오 三曰交遇오 四曰事務니라.”

인사(人事)에 넷이 있는데 첫째는 거처(居處)이고 둘째는 당여(黨與)이고 셋째는 교우(交遇)이고 넷째는 사무(事務)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사(人事)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루어지는 모든 일, 거처는 사람의 남녀 결합본능과 생산본능을 지닌 집을 의미하여 거주하는 곳, 당여는 군중과 더불어 의지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커뮤니티를 가질 것인가 이고, 교우는 사교로서 어떤 사람과 친분을 유지할 것인가 입니다.

이제마는 인간의 건강에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을 가지지 못한다면 이 세상 명의는 없다라고 얘기합니다.

거처가 분명하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는다면 건강을 상실 할 것이요, 고립되거나 일이 없는 사람이 어찌 건강하겠느냐는 반문이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일이 뭐 별거 있겠느냐고 말 할 수 있지만 건강하게 사는 사람의 조건에는 별거 아닌 것이 매우 별거인 것으로 여겨 사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 합니다.

별거 아닌 일상의 것이 인간의 조건에 밀접하게 파고들어 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거처와 당여, 교우와 사무가 곧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데 직접적 영향을 주고 이것의 아름다운 선택과 활용은 그 사람의 도량(度量)까지도 말해주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필자는 늘 사람의 도량을 얘기할 때마다 위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 도량을 의식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사람이 그 아름다운 노릇을 하며 산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이것은 인사(人事)의 두 번째라고 말하는 당여(黨與)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 형성된 가족과 친척, 학교, 친구들, 많은 동아리 등이 자신의 주변을 운명처럼 감싸고 있는 형국을 보면 더욱 위축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한 모두에게 사람의 도량을 보여 주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여’는 자신이 어디에 속함을 둘 것인가의 끝없는 유혹과 갈등이 반복되면서 매번의 판단과 선택은 선문답 수준의 도를 닦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안 뒤로는 사실 고민스러운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사람의 거처에 해당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발을 잘 못 들여놓아 인생을 망쳤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어떤 클럽(속함)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두려움과 기대는 상대적 귀로에 서게 되며 그것들의 결과는 참으로 기대치 이하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당여’는 ‘처신’의 동반 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사의 물리적 관계로 거처와 처신은 같은 맥락이며 거처는 고정적이지만 처신은 유동적인 차이 외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처(居處)와 처신(處身)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행복의 선택을 염두 해 둔 사회적동물의 본질적이고 고귀한 생존적 선택임을 자꾸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살 때는 모르지만 거처와 처신을 할 무엇인가가 강제로 빼앗긴다면 목숨을 걸었던 인류의 전쟁역사를 보면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굳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