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09:22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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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목사 - 마하나임 커뮤니티 교회
매일 보는 사람, 매일 보는 산, 매일 보는 모든 것들, 그 깊은 산중에 변하는 것이라고는 계절 따라 변하는 산천과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너무도 느려 잘 인식하지 못한 일상이었다. 가끔은 풀색 옷을 입은 군인들이 훈련을 위해서 얼굴에 시커먼 옷을 입고 지나가는 광경을 마냥 신기해 보기도 했었고, 발대를 얹은 지게에 엿을 싣고 오신 엿장수 아저씨나 보자기에 온갖 화장품이며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를 팔았던 아주머니를 제외하곤 우리들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보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때론 혼자, 아니면 서넛, 그리고 여느 땐 한 무리를 이루며 찾았던 사람들이 계절마다 띄엄띄엄 찾아오더니만 고로쇠물이 본격적으로 홍보되고,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이 알려지면서 더운 여름, 그리고 단풍철이 되면서 이전에 구경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산 입구에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생겨나기 시작하고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다가 잠시 들러 물 한잔 마시며 잠시 쉬어가는 사람이 어떤 이는 잠을 청하기도 하고 또 밥을 구하기도 해서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해 주는 것을, 고맙다고 전해주는 돈 몇 푼이 제법 쏠쏠하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재우고 먹여 주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에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주고 그만큼 받는 대가도 커지면서 차츰 주고 받는 것도 당당해 지는 듯 싶었다. 차츰 그러한 변화에 편승해서 마을의 집들도 시멘트 양철 지붕에서 전문적인 민박집 형태를 제법 갖추는 듯 가가호호 집들이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많이 오는 가을철엔 너나없이 방이 부족해서 서로 다른 집들로 방을 빌려 주기도하고 손님을 안내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집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렇게 돈맛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경쟁이 시작되었고 어느새 이웃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들의 눈빛도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랬다. 분명 이전보다 더 풍요로워지긴 했지만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산 다랑지 논을 일구고 산골짜기를 헤매며 약초를 캐고 그렇게 어렵게 살아갈 땐 서로 빌려주고 건네주는 정이 남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소유가 생기고 부터는 오히려 그렇게 건네는 정이 더 박해지는 것이었다. 거기에 수년을 이웃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기도 하고 세상을 뜨면서 어느 때부터인가는 외부에서 그 산골짜기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무리 친해져도 이전에 수년을 사귄 사람들처럼 친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끔 그분들과의 다툼에서 서운함이 배어나올 때는 객지에서 온 사람들 전체를 싸잡아서, 그분들과는 정을 주고 친하게 지내서 별로 좋을 것이 없다는 인식이 배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도 깊은 정을 오간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날 또다시 그들이 훌쩍 떠나갈 때는 미운 정 고운정이 더 큰 서운함으로 남았다. 잔치를 해도, 상을 당해도 서로 나누고 돕는 일들 역시 서먹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전엔 잔치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며, 모든 일을 젖혀두고서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도와 살았지만 그런 아낌없는 베풂과 나눔이 점차 시들해 진 것도 매 한가지였다. 그렇게 변해버린 고향이긴 해도 너무 깊은 애정을 갖고 살아서인지 타지로 잠시 가서 거해도 여전히 그곳에서는 이방인이요 잠시 거쳐 가는 곳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곳 광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직장관계로 신혼살림을 이곳에 차릴 때만 해도 아무런 연고지가 없던 이곳이 여느 곳이나 마찬가지고 그냥 타향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런 마음은 지역의 일이나 이웃들의 동향에 별로 큰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생활이 한해 두해 간 것이 벌써 7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필자가 살던 동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지역이래서 그런지 직업상 아는 사람들 이외에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것 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졌다. 이곳에 살고 있던 본토 사람들에게 나는 이방인일 수 밖에 없으며 이전에 필자의 고향처럼 그런 이질감을 서로가 느끼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배어 있었다. 때로 그렇게 본토와 이방인들(광양말로 객지 사람들)과의 사이는 여러 가지 일이나 삶에도 서로 잘 조화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기도 했다. 광양과 비광양인 사이, 제철과 비제철사이, 광양과 동광양사람들, 농업인과 화이트칼라내지 청칼라 사이, 그리고 광양인과 제2, 3외국인들 사이, 아파트 군별, 그 이외의 다양한 계층과 공동체 사이마다 본토와 이방은 무수하게 서로 견제와 상생의 사이를 오가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항구도시가 갖는 부정적인 특징을 그대로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도 있었다.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사람들을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유입된 분들 역시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일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그런 과정 속에서 때로 서운함 들이 오갔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과정이 지난 20여년 동안 이루어 졌으므로 한세대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은 본토인이나 이방인 너무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반복해서 당부하시는 많은 것 들 중에서 "이방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출애굽기22:21;신명기10:19)는 말씀이 있다. 그 이유는 전에 이스라엘도 이방에 떠돌던 나그네였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곳에 원래부터 살았던 분들로서는 이 말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할 수 있는가? 천만에, 지금 우리의 자녀들이 다들 타향으로 가서 객으로 공부하고 있고 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나그네의 입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모두 나그네이다. 또 이곳으로 오신 분들도 더불어 이와 같은 생각을 서로 함께 가져야 한다. 그리고 대접받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삶의 터전을 모두 바꾼 사람들로서 어쩌면 더 큰 아량으로 신뢰감 있는 삶을 살아 그들을 대접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바로 이곳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고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주위 이웃과 더불어 우리가 하는 일이나 생각 모두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방인처럼 그저 주위를 맴도는 떠돌이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그곳이 내가 지금 살 고향이며 내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라면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얄팍한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더 행복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은 지금 또다시 새로운 성장의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컨 부두의 성장과 무역도시(경제자유구역)로의 성장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모든 성장의 큰 이득을 다 얻고도 서로 불신하며 이전의 상처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린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했다.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그렇게 살도록 지음 받은 우리들, 정말 지금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행복'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며 살아 고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한두 사람이 바꿔서 될 일도 아니다. 이번에 새로이 시작하는 광양 신문 같은 지역 언론매체들이나 기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장들이 마련되고 그러한 일들의 중요성들이 서로 공유되면서 민관모두 한마음이 되어 가야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우리들 가슴마다 아련히 남아 있는 표현할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곳에 꽃피워지고 남겨지길 원한다. 처음엔 이방인이었지만 그래서 내 고향은 여기가 아니라 이전의 고향이라 생각하며 늘 회기본능이 꿈틀대었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는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그 모든 향수를 안고 이곳을 고향삼아 살아가며 또 그렇게 만들어 가련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여 쓰신 12제자들이 바로 우리 광양처럼 무역로가 교차하는 농경지인 갈릴리 출신 사람들이었다. 그 부족함 많은 사람들이 오늘 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남겨놓는 사역을 수행했다. 남도 끝 광양에 무역로를 허락하고, 귀한 물질과 훌륭한 자원들을 풍성하게 허락하시는 뜻은 바로 갈릴리 같은 이곳의 일꾼들을 통해서 세상 곳곳으로 역량을 끼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 귀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큰 역량 있는 거대 무역도시로 성장해 가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고향에 대한 소중한 것들은 결코 잃어버리거나 퇴색되지 않고 더 풍성하게 소유하며 성장해 가길 꿈 꾼다. 입력 : 2004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