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 ‘쿠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 ‘쿠바’
  • 태인
  • 승인 2008.08.04 09:34
  • 호수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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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국가인데 위험하지 않나’
쿠바에 취재를 간다는 필자에게 주변에서 보인 반응이다.
그랬다. 담배 ‘시가’와 ‘카스트로’ 정도가 우리가 가진 쿠바에 대한 상식이다. 필자 또한 단편적인 생각, 사회주의 국가라는 우려와 궁금 점을 안고 쿠바를 향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만에 도착한 캐나다 벤쿠버 공항. 공항 바닥에 엎드려 8시간을 자다 깨다 하니 날이 밝았다. 토론토로 4시간여 비행, 그리고 다시 4시간여를 날아 쿠바의 수도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만 무려 18시간, 드디어 콜롬부스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 칭한 쿠바와 만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바나’
 
호텔에 짐을 풀고 인구 220만명인 아름다운 항구도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 견학에 나섰다.
16세기 초에 건설된 아바나는 신시가지인 베다도, 구 시가지인 올드 아바나, 센트로 아바나, 마라마르 구역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특히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아바나는 19세기 후반 스페인 식민지였던 건축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터라 중세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신시가지, 고색창연한 세계문화유산 건축물들, 아바나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도시다.

쿠바의 밤은 문화 그 자체다. 밤이 되면 도시는 역동적인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카페 마다 맥주를 마시는 손님을 위해 노래와 춤과 연주가 펼쳐진다. 골목에는 카세트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그 유명한 ‘부에나비스타 쇼셜’ 클럽이 지천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1930-40년대 번성했던 아바나 동부의 사교장이었다. 하지만 쿠바혁명 이후 클럽 연주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갈 즈음 제3세계 음악전문 프로듀서인 라이 쿠더가 살아 있는 연주자들을 모아 앨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제작, 발표했다.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열광했고 기록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래미상 라틴퍼포먼스 부문 수상, 음반은 600만장이 넘게 판매됐다. 그 귀로만 듣던 음악, 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이 밖에도 아바나에는 볼거리들이 많다. 엘 모로 요새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거친 파도가 이는 산티아고 절벽에 세워진 이 요새는 바다를 통해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스페인 복장을 한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을 한 후 대포에 실제 포탄을 넣고 발사한다. 매일 밤 9시에 열리는 이 포격식과 바다와 어우러진 아바나 시내 야경이 멋스럽다.

혁명광장에 들러 행정부 건물 벽에 설치된 ‘체 게바라’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으며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 혁명 기념관도 주요 볼거리다.
 
카리브해의 매력 ‘바라데로’
쿠바를 빛내는 미국인 ‘헤밍웨이’ 
 
24년 만에 해수욕을 했다.
무엇이 오른 다리가 의족이라 사람들의 시선과 바다가 두려웠던 필자에게 용기를 주었는가. 티끌 하나 없는 모래, 바닥이 훤히 보이는 카리브해를 낀 바라데로에 가면 그 답이 있다.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바라데로 휴양지는 쿠바와 스페인을 비롯한 외국 자본이 공동 투자한 리조트들이 즐비하다. 카스트로가 집권하면서 미국은 쿠바 방문을 금지했다.

그러나 쿠바를 여행한 게 적발되면 수천 만원의 벌금을 내야 함에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는다. 이처럼 26km에 이르는 백사장을 가진 카리브해의 휴양도시 바라데로에는 캐나다인, 유럽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쿠바는 미국과 적대관계다. 헌데 미국 출신 작가 헤밍웨이가 관광 쿠바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가 쿠바에서 집필됐다. 쿠바의 매력에 빠져 헤밍웨이가 살던 아바나 외곽, 고히마르 마을은 ‘노인과 바다,의 실제무대이다.
 

그가 자주 들리던 ’라 테레자‘ 레스토랑은 지금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벽 마다 헤밍웨이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다.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박물관으로 꾸며 그가 사용했던 타자기, 원고지, 책, 낚시 도구, 사냥품 등 각종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불멸의 혁명가 ‘체 게바라’
 
1928년 아르헨티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의과대학을 졸업, 미래까지 보장된 그가 무엇이 아쉬워 험난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을까.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을 졸업하며 의사가 된 후 중남미를 여행하다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은 그는 56년부터 게릴라 훈련을 받으며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고 상공부 장관, 중앙은행 총재를 겸임하면서 쿠바의 의료체계를 세계 최고의 의료시설로 개혁했다. 
 

그렇게 쿠바의 2인자로 사회개혁에 몰두하던 그는 6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며 홀연히 쿠바를 떠났다. 그는 콩고(지금의 자이레)로 건너가 해방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실패, 다시 볼리비아로 들어가 혁명군에서 활동했으나 67년 정부군에 잡혀 총살당했다.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중남미의 대표적 혁명가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잡혀 총살당한지 4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쿠바 어디를 가던 체 게바라는 살아 숨 쉬고 있다. 쿠바인들이 입는 티셔츠, 도로변과 공공건물에 걸린 초상화, 거리에 흐르는 추모음악, 그렇게 쿠바인들의 가슴속에 아직 체 게바라는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