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1:43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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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 / 마나하임 커뮤니티 교회
유교학자로 유명한 율곡 이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일체이니 정성껏 받들어야 하며, 자기 생각대로 스승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 군사부일체에 관한 말이다.

그런데 ‘군사부일체’라는 말만 놓고 보면 “임금님과 스승님과 부모는 한 몸과 같다”라는 말만 있다. 통상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은혜는 다 같다”는 뜻으로 존경에 대한 의미로 이해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는 “임금과 스승과 부모가 하나같이 존경할만한 구석이 없다”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린다. 저 멀리 남아프리카의 만델라라는 사람의 이름이 어렵게 나오는 게 전부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세종대왕이나 링컨의 이름도 간혹 들리긴 하지만 지금 살아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이름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다.

선생님은 어떤가? 영화 「코러스」에서 아이들의 잠재능력을 일깨워 주신 ‘마티유’ 선생님,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탄광촌 아이들과 함께 아파할 줄 알았던 ‘최민식’이 분한 현우 선생님,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칠판에 쓰시며 아이들을 깨우는 ‘존 키팅’ 선생님, 또 「선생 김봉두」이런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그리워지는 것은 입시와 진학이라는 목표에 모든 실력이 좌우되는 학교현장에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상향 같은 스승의 상들을 만들어 갈 수 없는 사명 잃은 교사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진 때문이기도 하다. 본받을 만한 분이 아닌 지식을 가르쳐 주는 전달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풍토는 교실붕괴로까지 이어져 많은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긴박함 속에서, 자식양육의 대부분은 학교나 학원을 비롯한 타인에게 맡겨진 세대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부모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버지의 희생을 왜 해야 하는지,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부모가 되다보니, 기껏 아이들을 양육 하는 것은 경쟁적으로 무형의 사랑은 배제된 체 돈으로 사주고, 좋은 곳에 보내 주고, 비디오와 인터넷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지 알지도 못하고 기껏 주어진 시간에 귀찮다는 명분으로 방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고(일부), 자녀도 돈의 유무에 따라 부모능력의 유무를 결정짓는 세태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에서 극성스런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학부모가 연상이 되어버린 것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는 없고 자동판매기같이 돈벌어주는 아저씨와 밥이나 간식시켜주고 필요할 때 용돈 주는 엄마만 있다고 한다면 너무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진단이라고 할까?

이러한 군사부(君師父)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는 결국 사회구성원 개개인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믿을 놈은 하나도 없고 결국은 자기애(自己愛)에 목숨 걸게 만들어 버렸다. 극한적 자기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위아래도 없는 분쟁과 거역이 끊이지 않는다. 부정적으로는 자존감의 상실로 자학과 자살이라는 극단적 자기비하의 풍토도 쉽게 조성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런 사람들과 아이들을 향해 비판과 뒤늦은 교정을 위한 질책과 대안을 모색하지만 바늘로 매운재를 긁어내는 꼴이고, 골만 더욱 깊어지고 서로에게 책임전가만 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상과 벌, 혹은 법으로 고쳐지지 않는 게 많다. 대통령이든, 선생님이든, 부모든, 법이나 사학법이나 가정윤리법으로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정도의 효력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일에 목숨 건 정치적인 희생이 오늘 이런 사회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한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환경을 핑계한다거나, 법이나 감독으로 고쳐보는 방법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양은 지금 성장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가 지난 반세기 급격한 성장과 변화를 해온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곳곳이 개발되고 금새 건물이 들어서고 때론 그 모습이 활기찬 모습으로 보여 좋긴 하지만, 여전히 어딜 가든 깊은 전통과 오래 자리 잡은 듯한 그런 포근함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긴박한 개발 지역 사람들의 성향은 대개가 각박하고, 거친 것이 보통이며 더더군다나 항구도시인 광양은 그 정도가 더 크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유형의 재산을 얻은 대가로 많은 무형의 재산을 잃어버린 우리 현대사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세상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그러면 바로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라!”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네 자신을 변화시켜라!”라는 말도 같은 맥락의 말인데 새삼 우리에게 희망을 던진다.

잘못된 종교 신념을 가진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도를 바꾸거나, 법을 만들거나, 무력으로 대항해서 고친 것이 아니었다.

친히 왕 혹은 섬기는 리더로서의 모습이 무엇인지, 3년 동안을 제자들과 동거동숙하시며 마지막 날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참스승의 모습이 무엇인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상처를 아비의 마음으로 치료하시며 참 부모의 모습이 무엇인지, 당신이 친히 모델이 되어서 보여주시고, 당시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가장 강력한 변화의 주체가 되셨다.

후에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서 나를 본 받으라 말할 정도로 자신의 변화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 것도 좋은 실례이다. 역사상 존경받는 군사부의 모델들 모두 그런 모습으로 백성과 제자,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얼마 전 타계하신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눈짓)가 되고 싶다.” 어느새 부모의 자리에 서 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있고, 많은 이들의 장이 되어 있거나 리더의 위치에 있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를 보는 누군가에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 스승, 장(리더)등 주어진 명함에 나는 합당한가? 우리는 유형의 재산에 몸부림치는 것만큼 오래도록 우리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무형의 재산에 대한 재고와 개선을 위한 고민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바르게 서는 몸부림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획득해 갈 때 우리들 자신을 통해서부터 그곳들을 복원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너나 잘 하세요”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사회에 군사부일체가 회복되어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광양은 진짜 따뜻한 곳이 되어갈 것이고, 그러한 변화는 더 큰 영역과 수많은 무형의 재산을 풍성케 할 것이라 믿는다.
 
입력 : 2006년 01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