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광정의 죽음을 보며
배우 박광정의 죽음을 보며
  • 한관호
  • 승인 2008.12.18 09:51
  • 호수 29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한관호 바른지역언론연대 사무총장. 칼럼니스트
요 며칠 사이 문상을 무려 여덟 번이나 가야했다.
헌데 상가를 가는 일은 마음이 더 없이 무거운지라 참 고역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갈수록 길어져 최소한 팔순을 넘긴 나이라면 호상이라며 가벼이 나선다. 그러나 아직 이른 나이에 떠나는 이들, 슬픔에 잠긴 그들의 유족을 보는 일은 참 난감하다. 특히나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는 사람 관계가 한 다리 건너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는 터라 초상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시골 살이에서 오는 특징이다.

그런데 필자는 조문에 대한 곤혹서러움 뿐만 아니라 병문안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 아주 가까이 지낸 후배 녀석이 유방암에 걸려 입원해 있을 때도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통해 간간이 그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마음으로만 빨리 낫기를 빌었다. 다행히, 그 후배는 건강을 되찾아 춘천에서 신랑과 약국을 하며 잘 살고 있다. 퇴원 한 후배를 만났을 때의 그 어색함, 그럼에도 여전히 중병을 앓는 이들의 병문안은 가능한 한 피하고 있다.

이런 일로 때론 질타를 받지만 중병인 사람을 보면 아픈 상처가 들쑤시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져 자꾸만 회피하게 된다. 이는 교통사고로 상당히 오랜 동안 병원생활을 했던 때 겪었던 그 암울함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후부터 생긴 현상이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떠났다. 동창생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지만 그날도 봉투만 보내고 혼자서 술만 잔뜩 마셨다.

헌데 오늘도 부음 소식이다. 하나는 전화로,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떠난 평곤이는 물 꾼이었다. 형, 동생하며 지냈던 그는 남해에서 물질을 하며 해산물을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어부였다. 늘 물에서 생활 하지만 성질은 불같아 구질구질한 건 그냥 봐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고로 요새말로 안티도 여럿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하등의 이득도 없는 일일지라도 불편부당하다 싶으면 묵인 하지 않았다. 늘 그렇게 살아온 그였지만 팔면 꽤 돈이 되는 해삼, 소라, 돔 등을 반찬 하라며 기꺼이 주변에 나눠주던 정이 깊은 이였다. 몇 년 전 그가 폐암 판정을 받고 서울에 입원했을 때도 필자의 그 고질병이 도져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여지없이 아내에게 문상을 미뤘다. 

배우 박광정이 사망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독사 같은 배역을 했지만 독사라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 ‘화려한 주목보단 연기를 사랑했고 광대란 이름을 사랑했던 연예인’이라 추모하는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 드라마를 드라마답게, 연극을 연극답게 만들어 주셨던 분, 맛있는 비빔밥속의 한 재료처럼 얼큰한 된장찌개속의 한 재료처럼...이라는 추모 글들이 보인다.

후배와 박광정과 그리고 많은 아는 이들이 속절없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부쩍 삶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고맙습니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단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가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건강하시길”.

화려한 주연은 아니었으나 혼신을 다해 연기하며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박광정, 하여 연기자다운 연기자로 추모되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의 유언에는 그의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오르기 힘든 히말라야가 아니라 지척에서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마을 뒷동산이기를 바람 했다. 넉넉한 어머니의 품처럼 비바람으로부터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 때로는 제 살을 때어 내 땔감이 되고 주고, 또 때로는 고향을 떠난 이들의 향수가 되고 위안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자신만이 가는 아스팔트나 탄탄대로가 아니라 누군가 동행하며 그의 발걸음에 가 닿는 달빛이고 싶기도 했다.

세상을 살면서 변절이란 단어를 만나게 된다.
한 때 노동자가 주인이라고 부르짖던 이들이 비정규직 기간 연장, 생존의 한계선인 최소 임금을 대폭 축소하자는데 기꺼이 동참하는 걸 본다. 한 때 정론직필을 사수하다 고초를 겪었던 언론인과 또 다른 언론인들이 언론을 탄압하는 선봉장이 되고 권력에 곡학아세하며 용비어천가까지 나불거리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부침개처럼 이리 저리 뒤집어지는 삶을 두고 서산대사는 ‘눈 오는 밤길이라도 함부로 걷지 말라.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된다’고 했던가.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는 시점, 마음에 새기는 경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