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해공 신익희 선생과 광양 인연
[기고] 해공 신익희 선생과 광양 인연
  • 광양뉴스
  • 승인 2020.07.10 16:54
  • 호수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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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평산 신씨로 장례원경(정2품)을 지낸 신단(申檀)의 5형제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 때 백형(伯兄) 규희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우면서 서울한성외국어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후, 독립투사로 활동하다 해방이 되자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에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돼 부의장과 1~2기 의장을 지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2대 국회의장(1~2기)에 오르는 등 4회 연속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 대표최고의원으로 피선된 뒤 이듬해인 1956년 3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는‘한강 백사장에서 50만 군중에게 사자후(獅子吼: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5월 5일 새벽 6시경, 호남 유세차 전주로 가던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향년 63세)했다.

당일 오전 10시에 전주중앙초 교정에서 예정된 해공 선생의 유세장에는 전주시민을 비롯해 인근 군 단위 주민들이 약 6만여명이 모였다.

그러나 오전 10시가 넘어서 선생의 급서가 공식적으로 청중들 앞에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이때 청중들 앞에서 선생의 급서를 알린 이가 선생의 선전부장이었던 광양 진월 구룡 출신 조재천 공(1912~1970)이었다.

조재천 공은 이후 경북지사와 국회의원 3선, 법무·내무장관을 역임했다.

이 같은 조재천 공의 인연이 있었기에 해공 선생께서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2월 6일)에 광양읍 유당공원에서 민주당 창당 연설을 가졌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당초 계획은 인서리 우달홍 위패를 모신 우씨들 제각 세수재(世修齋) 경내로 돼 있었지만, 여당(정부)에서 순천 군부대에 연락해 군인들을 동원하고 훼방을 놓아 급히 유당공원으로 변경됐다.

지금은 유당공원으로 편입이 됐지만 그때 당시 논이라 논바닥에서 그들의 감시를 받아가며 호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목포·여수·순천보다 먼저 광양에서 민주당 창당을 알리는 해공 선생의 첫 연설이 시작됐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처음 출마했을 때 목포·여수·순천을 뒤로하고 광양에서 첫 유세를 시작했다고 한다.

여당의 감시망을 뚫고 행사를 무사히 마친 그날 저녁은 광양 초대군수를 지내고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석주 공(1901-1972)의 자택(광양읍 인서리163)에서 보냈다.

김석주 의원 아들 김경의 공이 만주관동군에 근무할 때 면회 가서 찍은 사진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개발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당시엔 대지가 1000평에 이르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해공 선생은 김석주 공 댁에서 조병옥 박사 등 수행원들을 비롯해 광양유지들이 다과를 하는 자리에 앞서 즉석에서 시(詩) 4수를 쓰셨다.

김석주 공의 장손자인 김종대 씨(민주평통자문회의 광양시협의회장)의 이야기에 의하면 해공선생께서 시(詩)를 쓰고자 조부님의 벼루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 속에 있는 붓이 세필 붓(작고 가는)이라 안되겠다 하여, 근처에 있는 광양서초 교장실 벼루집을 가져와서 쓰셨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김석주 공에게 써준 시문 유묵

당시 시문 4수(규격 : 반절지)를 지어주시는데 그중 2수는 사라지고 2수가 남아 있다.

그중 한수는“民國三十八年二月因 結成民主黨事宜 來全南光陽事畢 宿同志雲巖家 此地以魚塩柴水自古有名 余親訪此鄕 實覺名不虛傳 書好哉光陽 贈所感以化記念 雲巖 同志存”이다.

번역하면“1956년 2월 6일 민주당 광양군당 창당을 위해 전남 광양을 방문해 일을 마치고 동지인 운암댁에서 묵었다. 이곳은 고기와 소금과 나무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살기 좋은 곳으로 예부터 유명했는데 내가 친히 이곳을 방문해 그 이름이 헛되지 않게 전해졌음을 실제로 깨달았다. 좋도다 광양이여! 소감을 적어 기념으로 이 글을 드리니 운암께서는 간직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김석주 공에게 남겨준 이 글을 가만히 살펴보면 해공 선생도 조선조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남겨 구전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광양예찬(朝鮮之全羅道요 全羅之光陽이며 光陽之骨若이요 骨若之城隍이라)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전 광양시지 상임위원을 지낸 김광호 씨에 의하면 2000년 초반에 김옥현 전 광양시장의 명을 받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고령박씨 종중재실까지 가서 어사 박문수의 광양예찬 기록을 확인코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

해공께서도 알고 있었던 그 광양예찬 문헌을 하루빨리 광양시민이 확인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처럼 해공 선생은 광양예찬을 책으로 보고 말로만 듣던 광양고을을 직접 본 뒤 김석주 공에게 건넨 시문에 그 같은 평을 했으며, 이 지역 인사들(김석주, 엄상섭, 조재천 등)과도 좋은 인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