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사이를 걷다] 생태도시지향은, 지역도시의 필연적 과제다
[도시 사이를 걷다] 생태도시지향은, 지역도시의 필연적 과제다
  • 광양뉴스
  • 승인 2021.04.02 17:48
  • 호수 9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성진
건축가(도시공학박사)
노성진공간연구소장

우주는 신이 만들었다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위대한 작품...? 그러나 지속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이슈로 남아 있다.

전 세계가 추구하고 있는 생태도시라는 이야기가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지방 도시들의 미래를 견주어 볼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도시요소다.

생태도시는 현재도시를 바라볼 때 쉽게 접근 될 수 없는 여건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도를 넘은 상태의 도시는 회복과 치유의 비용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최대주의와 표상적 미래를 꿈꿨던 19세기, 20세기는 바로 지금의 21세기가 되었다. 아마도 지금의 도시를 꿈꾸진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현재의 선각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많은 행동가들과 지식인들은 도시에서 생태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스마트해져가는 도시에서 오히려 생태도시구현이 더 쉬워진다고 얘기하고 있다. 공유의 속도와 수평 공감의 소통능력과 SNS를 통해 소통되는 도시는 빅데이터에 의해 타인의 생각을 모아 볼 수 있는 환경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 온 세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유일한 이 시대의 위로는 군국주의와 봉건제도하에 지도자의 의식이 곧 법이었음에 도시가 결정되었을 것이라는 위로다. 지금의 사회, 문화 발전의 카르텔은 모든 다수의 정론이 공감에서 시작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경험했기 때문이다.

요즘 탈 도시현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유는 생명과 직결 된 도시문제에 봉착되고 있는 이유다. 초 집결 때문에 도래 되는 범죄, 지가상승, 생활비용의 폭발적 증가, 요즘처럼 대도시라서 더욱 취약한 코로나 팬데믹 같은 것들이 동시에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도시를 수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새로 구축되는 삶의 터들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제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감수성을 자극하는, 그래서 회화적시선이 공간을 지배하는 소규모 파운데이션들이 모여 도시를 만드는 것이 매우 이상적 일 것이다. 공감공동체에서 소통도시로의 합체가 그것이다.

과거 로마가 힘만 자랑하다가 시이저의 시녀가 되어버린 국민들을 끌고 가는 철학과 소프트를 찾지 못해 국가가 멸망해 갈 때 생겨난 것이 바로 사재들이 세운 소형공동체마을인‘키프츠’나‘모샤브’였던 것처럼, 15세기의 피렌체의 정치, 경제, 문화, 인류건강 등 중요 도시존재 이유들이 무너져 갈 때 예술과 문화,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16세기 르네상스처럼... 그래서 사실 자생력은 그때부터 발아되어 지금의 유럽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생태도시의 실현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의식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쿠바가 수십 년의 경제 제재 이후 도시농업의 발상지가 되었고, 브라질 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했던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잘 가꾸어진 생태도시‘쿠리치바(Curitiba)’가 생태도시로 태어난 것은 우연은 아닌 이유이다. 의식의 전환과 소통 공감의 승리였던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2008년에 UNEP로부터 우수환경과 재생상을 받았고, 타임지와 로마클럽 등으로부터도‘우수 환경도시’로 선정되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최근 집계한 아시아 도시인구 현황을 보면 한국의 도시인구 비율은 81.5%다.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100%인 곳도 있지만 크기가 작은 땅 대부분이 도시로 만들어진 곳이고, 한국과 자연환경이 비슷한 일본과 대만의 도시인구 비율은 각각 66.5%와 59.1%다. 한국은 1990년 73.8%, 1995년 78.2%로 20년 동안 7%포인트 넘게 증가했다. 수치가 보여주듯 한국은 고도로 도시화된 나라다. 유난히 한국 사람들의 도시사랑은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정치학’에서 도시국가(폴리스)는 개인과 가족보다 앞서며,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로 이뤄진 정치공동체로 규정했다. 도시국가는 본성상 가족과 우리 각자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전체가 필연적으로 부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최종목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도시도 존재 할 수밖에 없다면 도시에 사는 인식의 전환은 17세기 계몽주의가 세계의 가치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