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민간인 희생자 중 22% 차지
경찰서 등 관공서 많아 피해 가중
지난 6월 역사적인‘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광양지역의 민간인 피해 상황은 백운산 근처에 집중된다. 당시 백운산은 여순사건 잔존세력(구 빨치산)과 한국전쟁기의 인민군 잔존병력, 빨치산 세력들의 거점이었고, 남부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통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광양읍은 전체 민간인 희생자 612명 중 약 21.8%인 134명이 파악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 지역의 피해자 유형은 134명 중 군경토벌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34명, 부역혐의자 9명, 여순사건 피해자 59명, 좌익 2명, 형무소 9명, 보도연맹 2명, 개별 및 기타사건 19명이다.
광양읍 지역에서 주목할 점은 피해자 134명 중 가해자가 군인이나 경찰인 경우가 118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던 반면 지방좌익이나 인민군, 빨치산인 경우는 9명, 미상은 7명으로 파악됐다.
성별은 남성이 127명, 여성 6명, 미상인 경우가 1명이었다. 연령은 10대에서 60대까지 분포를 보였지만 10~30대가 다수를 보였다.
피해시기는 여순사건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까지 이어진다.
광양읍 지역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온 것은 이곳이 순천과 백운산을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요건에 더해 광양경찰서 등 주요 관공서가 있어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49년 9월 16일 발생한 광양경찰서 습격사건, 1950년 9월 28일 수복 당시 익신리 주민 학살사건, 1951년 1월 14일 광양읍사무소 습격사건 등이 이어지며 피해는 가중됐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시기 광양읍 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 희생지로는 솔티재, 반송재, 검단재, 초남리(초남마을과 현원마을)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광양읍 솔티재
현재 고속도로의 신설 확장으로 크게 변형된 곳이다. 사곡면 죽림리 직동마을의 솔티재는 광양읍과 골약면의 경계지점으로 1948년 10월 22일경 마산주둔 제15연대가 반군의 공격을 받아 연대장 등이 반군에 생포되기도 했다.
1949년 4월께 골약면 중양마을에서 전투가 발생하자 제15연대가 지원하러 왔다가 솔티재에 매복해 있던 반군들에게 다수의 군인들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다.
이곳에서 민간인 희생은 크게 두 차례 있었는데, 1948년 11월 11일 봉강면 지곡리 다수의 주민이, 1949년 9월 21일에 옥곡면의 30여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반송재
반송재는 지역민들에게‘반송재이’로 불리며 현재 상태는 도시개발로 지형이 바뀌었다. 위치는 광양읍 덕례리 주령마을 뒤편이다.
이곳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광양경찰서 1개 중대 경찰병력이 순천으로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순천 진입 전에 반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3∼4명의 희생자를 내고 철수한 곳이다.
이에 격분한 경찰은 좌익 혐의자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덕례리 반송재로 데려가 살해했다. 광양시 조사자료에서는 당시 이 곳에서 27명이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1년 1월 14일 광양읍사무소 습격사건 직후인 1월 16일께 광양경찰서로 연행된 약 40명이 반송재 골짜기로 끌려가 집단 학살됐다.
검단재
이곳 역시 도시개발로 지형이 변한 곳으로 광양읍 석정리 검단마을 인근에 있다.
1949년 9월 16일 오전 2시께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경찰서와 각지서, 주요 관공서, 제15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광양서초등학교를 공격했다.
이후 좌익 협조자들을 색출해 구산리 우두마을, 반송재, 솔티재, 세풍리 뒷산(검단재), 순천 서면 구랑실재 등에서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1951년 1월 14일 빨치산의 주요 관공서 습격사건 후 같은 달 16일 광양 경찰서에 유치된 약 50여 명의 민간인이 검단재에서 집단 학살됐다.
초남리 민간인 희생지
이곳은 광양읍 초남리 초남마을과 현월마을에 위치한다. 초남 봉화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금광으로 유명한 초남광산이 자리한 곳으로,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과 군경간의 빈번한 전투가 전개된 곳이다.
초남마을과 현월마을 중간에 위치한 ‘멀구모탱이’(현 초남역 인근)는 당시 지세가 험난해 자주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49년 9월 16일 오전 2시쯤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경찰서와 관공서, 국군 제15연대 1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광양서국민학교를 공격할 시점에 경찰에 의해 현월마을 민간인이 총살되기도 했다. 인근 죽림리 쌍두, 백동, 임기마을에서도 여순사건과 6·25전쟁 중에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옛 광양읍사무소
광양읍사무소는 광양읍 읍성3길 5-1 일대에 있었다. 이곳은 현재 멸실된 상태로, 당시 광양읍사무소와 광양군청 일대는 거의 동일한 형태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여순사건 때와 1949년 9월 6일 오전 2시께 빨치산의 광양시 공격 때의 상황도 유사하다. 광양읍사무소 공터에는 광양 주민 수십여명이 연행됐으며 이들은 광양읍 쇠머리(구산리 정자나무)에서 학살됐다.
1951년 1월 14일 빨치산의 공격 때 광양읍사무소는 본청사와 청사 부속 서류고, 제반공부, 숙직실, 창고, 비품과 소모품 등이 화재로 모두 탔다.
옛 광양경찰서
광양읍 칠성1길 44번지 공용주차장에 있었고, 현재는 멸실된 상태다.
여순사건 직후 반군 진압을 위해 순천으로 출동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한 경찰은 경찰서에 구금하고 있던 좌익혐의자들을 총살시키고 후퇴했다. 이후 광양경찰서는 빨치산 토벌작전의 주요 거점이 됐고, 6·25전쟁 시기에는 인민위원회 내무서로 사용됐다.
인민군 후퇴 후 백운산은 다시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고 광양경찰서는 빨치산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옛 광양서국민학교
현재 위치는 광양읍 숲샘길 29번지로 변형된 모습으로 현재 남아있다. 여순사건의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토벌군은 주로 광양서국민학교에 주둔했다.
1949년 9월 16일 빨치산의 광양읍 습격 당시 이곳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제15연대 1대대가 공격을 받았다.
6·25전쟁 시기였던 1951년 1월 14일에도 광양읍에 대한 빨치산의 공격이 있었으며, 이때도 광양서국민학교는 토벌군의 주둔지로 활용돼 빨치단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네모 눈동자’이경모 사진 속
광양의 아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광양이 고스란히 안아야 했던 아픔은 고 이경모 작가의 사진 속에 담겨있다.
이경모 작가는 1945~1953년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으로 재직하며, 8·15해방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격동기 역사를 카메라 담아 후세에 남겼다.
이경모 작가는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광양에 은거했던 노산 이은상 선생과 인연이 되어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으로 발탁됐고, 격동기 현장의 역사적인 모습을 필름에 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최근 전라남도와 순천문화재단이 발간한 여순역사만화‘동백꽃 필 때까지’에도 실렸다.
만화에서 이경모 작가는 광주 회사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광양과 인근 순천 등의 여순사건 현장 취재에 들어갔다.
광양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친구마저 경찰에 의해 반송재로 끌려갔다는 들었다. 친구의 누이와 이경모 작가는 함께 반송재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반송재를 오르는 주령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산 속 어귀에서 몇몇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경모 작가는 이곳에 버려져있는 수십 명의 시신을 목격했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중에는 멍석에 덮여 지게에 얹힌 친구의 시신을 보며 하염없이 울던 친구 누이의 모습도 생생히 남았다.
이후 사진을 현상하던 그는 사진을 보는 것,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광양을 다녀온 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켜켜이 널브러진 반송재 시신들이 눈만 감으면 괴롭혔다.
그는 먼저 간 친구의 무덤 앞에서 좀 더 치열하게 사진을 찍기로 약속한다.
친구의 억울한 이야기를 나의 또 다른 시선‘네모 눈동자’와 함께 세상에 알리겠다고 말하며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