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노 교수의 일기장 속 ‘여순사건’...공포와 참상 고스란히
구순 노 교수의 일기장 속 ‘여순사건’...공포와 참상 고스란히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2.07.22 18:05
  • 호수 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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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곡 거주 김행춘 교수, 74년전 메모 공개
종일 총소리…거리엔 거적에 덮인 시체들
“왜 동포끼리 총칼 겨누고 죽이나”고뇌
김행춘 전 교수가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놓으며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지역의 큰 아픔인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의 공포와 참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이가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20여년 전 경상대학교에서 퇴임해 현재 광양시 옥곡면에서 살고 있는 김행춘 전 교수(91)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해 유년기를 보낸 후 해방 직전 가족과 함께 할머니의 친정이 있던 광양 옥곡으로 이사를 왔다.

광양으로 오기 전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까지는 조선말과 글을 배웠으나 2학년부터는 학교 교육에서 조선말과 글이 사라지며 일본말과 글만 배웠다.

광양으로 온 후 일제 치하에서 해방됐고, 한국말과 글에 서툴렀던 그는 해방 후 옥곡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해 한글을 배우고 익혔다.

그는 이후 6년제(중등과 3년, 고등과 3년)로 운영되던 순천사범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경험했다. 그의 나이 18세로 고등과 1학년 때였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인 1947년부터 일기를 써왔고, 그가 경험한 여순사건의 참상은 누렇게 바랜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 교수의 일기장에 남아있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20일부터 시작된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이날 김 교수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됐다. 국군과 경찰의 투쟁이 일어났다’는 문구로 여순사건을 적었다. 이날 학교에 등교했으나 1교시도 온전히 끝나지 않아 귀가하라는 명령이 내렸고, 집에 잠깐 돌아와 있으니 경찰관들이 무장을 하고 트럭을 타고 오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순천당의원의 소실지 시멘트 벽에 약 30명의 경찰관들이 모여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고, 돌연 총소리가 나며 순천이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드는 모습을 기술했다.

그는 왜 국군이 경찰관과 전투를 하고 동포가 동포를 죽이는지에 대해 답답한 마음과 함께 마음놓고 살 수 없는 현재의 무서운 처지를 적으며‘갑작스런 총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식음땀이 흐른다’고 표현했다.

다음날인 21일은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요란했고, 밖이 궁금해 잠시 밖에 나가보니 경찰 색출을 위해 23일 오후 6시까지 통행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포고를 봤다. 또 길에는 시체가 가마니에 덥여있는것도 목격했다. 이날 아침 옆집 경찰주택에 군인이 와서 조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갈 뻔한 내용도 적었다.

그는 여순사건의 소용돌이가 한창인 순천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도 없이 자취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이후 24일 저녁 무렵에 광양에 계시던 아버지가 통행금지를 뚫고 걸어걸어 독자인 아들을 구하러 순천으로 찾아 왔다. 그날 밤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들을 돌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김 교수는 다음날인 25일 이른 아침 아버지와 순천을 떠나 광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산속의 작은 길이 아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큰 길을 이용했다. 떳떳하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함일 거라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도중에 진압군을 만났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길을 갈 수 있었고, 길에는 사건의 참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김 교수와 아버지는 이날 밤 옥곡 집에 무사히 도착해 가족과 만났다.

옥곡 집에서 겪은 일화도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948년 11월 3일 오전 3시쯤 군인들 3명이 와서 총구를 겨누며 자신의 집에 있던 7구 진공관 라디오를 가져갔다. 당시 온 가족이 애용하던 귀한 라디오였지만 미련없이 내줬다. 이날 주변 이웃들도 돈과 옷가지, 의료기구와 약품을 내줘야했다.

김 교수는“군인들이 집에 와 총을 겨누자 어머님이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며“어머니의 이빨이 부딪히며 ‘딱딱’하는 소리가 뜰 아래에 있던 내 귀에도 들렸다”고 당시의 공포감을 전했다.

이듬해 봄 김 교수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여순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부산사범학교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징집됐고, 유엔군에 배속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미군들과 함께 장진호 전투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다. 혹한의 추위에 떨었던 1.4후퇴의 기억도 생생하다.

철이 들면서부터 일제 치하의 설움과 고통을 이해하게 됐고, 한창 공부할 중고등학교 시절엔 여순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며 스무살엔 한국전쟁에 참가해 동족상잔의 아픔을 함께하는 질곡의 개인사가 펼쳐진 셈이다.

성악 전공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김 교수는 당시 음악계의 큰 인물인 현제명 선생과 인연을 쌓게 됐으며, 모교인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진주교대에서 교수로 발령을 받게 된다.

육영재단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경상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후학을 양성하며 교육대학원장과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