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조세제도
역사속의 조세제도
  • 김정태 진보연대 정책위원회 위원장
  • 승인 2009.07.16 08:56
  • 호수 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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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육조는 물론 각 관사, 서울 안의 전·현직 관리,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관리로부터 여염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1430년 3월, 세계 최초의 전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하라는 세종의 명령이다.
 여론조사를 하기 위해 걸린 시간은 약 5개월, 표본수가 무려 17만명에 이르고 찬성과 반대의 이유까지 조사하였다.

 전제군주의 격에도 맞지 않고 다소 번거로운 작업을 세종이 강행한 이유는 바로 ‘나라를 새로 세우기보다 어렵다는 조세제도 개혁’을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은, 관리가 농지를 방문해 농사의 풍흉을 판단한 뒤 이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사관의 주관적 판단과 만연한 비리가 이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그 불공정성이 백성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세종은 보다 객관적인 방식의 세금제도를 만들고자 했고 지금으로 말하면, 조세 투명성과 과감한 누진세 적용이 새로운 조세제도의 골자이었다.

새로운 조세제도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찬성 57%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우세하였고 중심에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면 많은 조세부담을 져야 하는 대지주 고위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지 이제 30년, 신생 국가의 먼 미래를 다지고픈 세종은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재상 황희마저 반대하는 조세개혁을 기필코 단행하고자 여론조사라는 파격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합리적 제도 창조를 위한 긴 논의 끝에 1444년 세제가 완성되고  새로운 세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전라도에 1450년 처음 실시 후 전국에서 시행되었다.

조세제도는 한 국가의 건강성과 미래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이다. 조세제도의 형평성 문제로 인해 역사속으로 사라진 수 많은 국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시기와 장소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교묘한 제도를 이용해 재산을 많이 가진 지배층이 세금을 덜내고 가진 것이 없는 피지배층이 더 세금을 많이 내어서 국가 재정을 충당하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면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까이는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천년왕국 신라의 멸망, 역대 중국 통일왕조의 멸망, 서양 근대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던 3대 혁명(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중세 교황의 권위 몰락, 불멸의 제국으로 불리던 로마의 몰락도 근본 이유가 잘못된 조세제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09년 대한민국, 조세제도가 바뀌고 있다. 직접세가 줄고 간접세가 늘어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들이 추진하는 세제가 조세원리에도 충실하고 서민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해도 부자가 덜내고 빈자가 더내야하는 제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도저히 신생국가의 패기를 느낄 수가 없어 참담하다. 지배층이 공동체의 의무를 솔선할 때 그 공동체는 전성기를 누렸으며, 그 의무를 저버릴 때 그 공동체의 말로(末路)는 멸망으로 귀결되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부동산투기와 조세포탈 범죄를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언제까지나 인내하리라 생각하는 저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오히려 가엽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E.H. 카의 말을 다시 새겨 본다.
건국 60년, 우리 나라가 너무 빨리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