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가 죽인 정수근
오보가 죽인 정수근
  • 한관호
  • 승인 2009.09.10 09:23
  • 호수 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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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커밍아웃부터 해야겠다.
필자는 롯데 팬이다. 롯데 선수 중에서도 정수근이 좋다. 그의 야구 실력을 높이 산다.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는 역동적인 경기 모습, 타석에 들어선 그의 결연한 표정에서 집중력과 야수성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롯데 팬이라고는 하나 사직구장에서 비닐봉지를 머리에 두르고 아님 신문지로 만든 벙거지를 둘러쓰고 악다구니 지르며 응원해본적은 없다. 경남 출신이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지역 연고에 따른 심정적 팬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허물없이 지내는 한 친구는 롯데 극성 팬이다. 제 아내 생일은 기억 못해도 롯데 선수들 이력은 쫙 꾀고 있다. 롯데가 패한 날은 어김없이 술로 화를 누르는 광 팬이다.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대뜸 신문쟁이들 때문에 미치겠다며 역정이다. 정수근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롯데가 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니 마니 하는 기로에 서 있는지라 친구는 상당히 예민해 있었다. 그런 시점에 언론 보도로 인해, 정확히 말하면 오보로 인해 정수근의 선수 생명이 끝나게 생겼으니 그냥 있을 친구가 아니다. 신문사 밥을 10년 먹고 지금도 언론 법인에 근무하고 있는 필자가 화풀이 상대로 딱 걸렸다. 10여 분, 케이비에스 방송과 연합 뉴스를 잘근잘근 씹더니 ‘똑 바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일찍이 언론의 병폐 중에 하나인 ‘아니면 말고’ 보도가 민폐를 끼친 일이 어디 한 둘이었는가. 노무현 대통령 서거만 하더라도 검찰 브리핑을 진실 여부에 대한 검증도 없이 중계방송 하듯이 무차별 유포시킨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지적이었다.
KBS는 지난 1일, 아침 뉴스에서 ‘롯데 정수근 선수가 징계가 풀린 지 3개월 만에 음주상태로 물의를 빚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가 오전 7시 45분, ‘정수근 주점서 행패‘라는 제목으로 ’정씨가 주점에서 행패를 부려 경찰이 출동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특히 과거 정수근이 범한 몇 번의 실수까지 제다 들추어 내 더 이상 이런 형태를 용납할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확인사살 격 보도를 했다. 

이후 이 사건의 파장은 한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답습한다.
스포츠 신문 등 대한민국 거의 모든 언론들이 비난 기사를 쏟아냈다. 인터넷에서도 난리가 났다. 특히나 열광적인 롯데 팬들의 신경질 적인 반응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언론보도가 확산되자 정수근 선수가 나서서 ’사실 무근‘을 주장했지만 이미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였다.
다음은 정수근의 소속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 차례다. 롯데구단은 매우 신속하게도 사건 보도 당일, 정수근을 퇴출했다. 그리고 불과 이틀 후 KBO 상벌위원회는 선수에겐 사형이 다름없는 ‘무기한 실격’ 처분을 내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팩트 자체에 이상이 없는 한 징계의 과중 논란을 떠나 보도 자체엔 별 문제가 없다. 이때까지 확인 된 ‘사실’은 정수근 선수가 해운대 한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다 웃통을 벗고 난동을 부리고 욕을 해 종업원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으나 별일 아니라는 업소 해명을 듣고 철수했다. 또 기존에도 몇 번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 선수라 롯데 구단이나 한국야구위원회 또한 중징계가 불가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확산되면서 ‘사실’ 뒤에 감쳐진 ‘진실’이 드러났다. 경찰에 신고한 업소 종업원이 ‘허위 신고’였다고 밝힌 것이다. 정수근은 웃통을 벗지도 욕설을 하지도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저 조용히 술을 마시다 갔을 뿐이라고. 더구나 경찰은 가게에 들어와 보지도 않아 정수근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롯데 팬인 종업원이 다음날 경기가 있는데도 정수근이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자 화가 나 경찰에 거짓 신고를 했다. 신문과 방송은 기사 출처자의 말만 믿고 사실 확인도 안 한 체 특히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정수근의 입장을 들어보지 않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런 보도를 근거로 롯데와 한국야구위원회는 한 선수의 생명을 끊었다.

언론에 근무하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사실’과 ‘진실’의 차이점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그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은 명확히 다르다. 한 분별력 없는 야구 팬의 거짓에 방송과 신문과 야구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가 놀아났다. 그 무심한 놀이 뒤에 남은 건 한 야구 선수의 죽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