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부터 하라
고해성사부터 하라
  • 한관호
  • 승인 2009.11.19 09:51
  • 호수 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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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80년대, 어느 야트막한 산언덕 참호. 부대 바로 앞산에 적군이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있어 매복을 서고 있었다.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자대에 온지 이제 3개월에 불과한 신참내기인 필자는 충남 서산이 고향이었던 상병과 한 조였다. 군화에 빗물이 스며 들어와 질척거리고 판초 우위를 입고 있었으나 모기가 내내 공습을 하는, 그야말로 신경질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기약 없는 매복에 지쳐갈 즈음, 누군가의 입에서 ‘네 앞에 적이 나타나면 총을 쏠 수 있겠나’ 하는 폭탄성 발언이 나왔다. 내무반에서 야간 매복을 준비하던 우리는 마치 전기에 감전이 된 듯 얼어붙었다. 누구도 말은 안했으나 사람을 총으로 쏴야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건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우리 부대원들에겐 닥치지 않았다. 간첩 작전은 종료됐고 필자는 미뤄진 첫 휴가를 나왔다. 하지만 제대한 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어쩌다 그 소름 끼치는 상황을 꿈에서 만나곤 한다. 
어제도 그랬다.

한겨레신문에서 전남 진도에 사는 박동운씨 기사를 읽고 또 악몽을 꾸었다. 박씨는 지난 81년, 북에서 남파된 아버지를 따라 2번이나 북한에 다녀왔으며 24년간 고정간첩이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진도농협에서 멀쩡히 예금계장 일을 맡고 있던 그가 졸지에 철도 안 든 12살 때부터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평생 보지 못했다. 물론 그가 한 자백이었지만 만삭인 아내를 고문하겠다는 수사관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한 허위자백이었다.

그렇게 그의 모친, 작은 아버지 부부, 고모 부부 등 일가족이 간첩이 되었다. 이들은 길게는 18년에서 4년여까지 옥살이를 했다. 출옥은 했으나 박씨는 아내와 이혼해야 했고 친척 자제들은 ‘간첩 새끼’란 주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다. 한국 사회에서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무슨 말이 필요하랴.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매국행위에 가담했거나 독립운동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 일정직위 이상의 부일협력자 등 4,389명의 친일과 해방 후 행적이 실렸다. 이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웬만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저명 인사들이 들어있다. 더구나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20인도 들어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지난 2003년 국회에서 예산 5억원을 전액 삭감하자 한 누리꾼이 인터넷에 ‘예산이 없어 사업이 좌초될 위기’라고 올리자 시민 모금이 들불처럼 번져 모두 7억여원이 모아져 이번에 책을 발간하게 됐다.

그러자 소동이 벌어졌다. 우선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발끈했다. 책을 펴낸 민족연구소를 좌파로 매도하는가 하면 국론 분열, 정치적 공세 따위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당위성을 훼손하고 나섰다. 이는 두 신문사 사주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후손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이들은 주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일 아니냐는 항변이었다.
그런 한편 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도 상당한 아픔을 겪은 것으로 보도됐다. 이윤 운영위부위원장의 조부인 이준식, 연구소 설립의 산파역할을 했던 임종국 선생의 부친 임문호, 임헌영 연구소장의 대학 은사였던 백철씨 등도 이름이 올라있다. 

그런 한편에서는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 유산 찾기에 나서고 있으나 친일파였던 고희경의 후손들은 물려받은 친일재산인 땅을 매각하고 그 대금 4억 8천여만원을 국가에 반환했다. 간첩으로 몰려 가정이 파탄 나고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뎌온 박씨는 ‘저승사자 같았던 안기부 수사관들, 그들만큼 험악했던 검사들, 고문 받은 상처를 확인해달라고 호소하자 오히려 자신을 꾸중하던 판사들’을  진실이 밝혀진 마당에 이제 그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그래, 그렇게 용서 받으려면 안중근이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질 때 오히려 호의호식하며 일제를 찬양했던 이들, 그들의 후손은 고해성사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늘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