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심규상
기자 심규상
  • 한관호
  • 승인 2009.12.03 09:46
  • 호수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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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기자 정신은 살아있는가.
얼마 전 충남 지역에서 주재기자들의 금품수수 사건이 불거졌다. 헌데 이들 해당 언론사나 방송은 물론 이거니와 다른 언론에서도 이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다. 문제는 단순히 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시나브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라 일컫는 언론 풍토가 날이 갈수록 망가지고 있다.     

그래서 생각난 사람,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다. 언젠가 이 지면을 통해 광양신문 기자들 역시 심기자의 기자 정신을 배우길 바라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심기자는 충북 영동이 고향이다. 헌데 강 건너 무주 설천중이 더 가까워 영동이 아니라 설천중학교를 나왔다. 그의 설천중학교 때 일화 한 토막.

두메산골에서 농사 몇 떼기 짓는 부모님은 그 시절 촌사람 사는 게 다 그랬듯이 끼니나 건너뛰지 않으면 다행이던 곤궁한 살림이었다. 그가 중 3이던 어느 체육시간,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는데 유독 심 기자가 입고 나온 운동복만 여느 학생들과 달랐다. 체육 선생이 ‘너는 왜 학교에서 입으라는 운동복을 입지 않았느냐’며 몽둥이로 머리를 툭툭 쳤다.

심 기자가 입은 체육복은 색깔은 여느 학생들 운동복과 비슷하지만 무늬가 달랐다. 사연인즉슨, 심기자 부모님은 학교에서 맞춰 입으라는 운동복이 비싼지라 시장에 나가 싸구려 운동복을 사 입혔던 것이다. 체육선생의 계속되는 치도곤에 참다못한 심규상 학생이 ‘00, 아버지가 사준 것은 운동복이 아니냐’며 대들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욕설까지 들어가며 무안을 당한 선생은 노발대발 했고 그는 그 길로 내뺐다.

심기자, 싸구려 체육복에 안 그래도 의기소침했던 터에 선생이 매질까지 하며 모욕을 주자 요새말로 내질러 버린 것이다. 그때는 군사독재 시절이라 교련이니 하며 학생들에게 까지 군사훈련을 시키고 사회가 붕어빵처럼 획일화로 치달으며 ‘까라면 까던 때’였다. 그 시절에 걸맞게 이튿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유기정학이었다.

그렇게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대전에 있는 배제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유순히 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도 꽤 오래해야 했다. 한 때 충지협(충남지역 주간지 협의회) 대표 기자로 도청을 드나들던 그는 2002년부터 대전충남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고 있다.
또 다른 심기자 일화다.

얼마 전 국회의원과 지역주간지 발행인 몇 사람이 대전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필자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식사를 겸한 간담회가 끝나고 국회의원과 심기자, 언론계 선배 한 분은 생맥주집으로 2차를 갔다. 거기서 사단이 났다. 소맥 폭탄주가 몇 잔 돌고 거나한데 갑자기 국회의원이 심 기자에게 연방 폭언을 날렸다. 그가 평생 심 기자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며 절규하듯이 내뱉은 사연의 전말은 이렇다.

대전 모 구청장에 당선된 그에게 문제가 불거졌다. 그가 포럼을 만들어 후원금을 받아 세미나 등을 열었는데 이게 정치자금법 위반이었다. 제보를 받은 심기자가 취재에 들어가자 그의 부인까지 찾아와 울며 매달렸으나 보도가 나갔다.

그러자 선관위가 조사를 벌였고 검찰에서 기소해 1심에서 당선무효 판결이 났다. 이어 항소심이 진행 중 인데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그가 구청장이 되기 전 한 건설 업체가 공기업 공사에 재료를 납품할 수 있게 해달라며 거액을 건넸다는 제보였다. 두 건 모두 유죄 판결이 났으나 당선 무효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보도들로 인해 재선을 노리던 그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무소속으로 나왔으나 낙선했다. 그 후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당을 바꿔 국회의원이 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정치생명이 끝날 뻔 한 기사를 썼으니 한이 맺혔을 법도 하다. 헌데 가관인 것은 질타를 묵묵히 듣던 심기자 왈, ‘그때 내가 사실대로 보도를 했으니 오늘날 구청장 보다 더 좋은 국회의원이 된 거 아니냐’ 였다. 

심기자의 일화는 끝이 없다. 대전에 있는 대행 건설사 대표가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켜 위령비를 세웠다. 이를 파헤치고 몇 년간 지속적으로 보도해 결국 위령비를 철거시켰다. 언론계 한 선배는 ‘심기자가 그 기사를 안 썼으면 그 건설사에서 최소 40평 아파트 한 채는 받았을 것’이라 했다.
40대 중반인 심기자의 네 식구는 아직도 전세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