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존귀함과 축복받은 삶을 기원하자
생명의 존귀함과 축복받은 삶을 기원하자
  • 광양뉴스
  • 승인 2010.02.11 10:11
  • 호수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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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태 (새삶교육문화연구원장)

삶이 각박해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밖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귀중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최근엔 국내적으로는 물론 세계적인 굴지의 대기업의 이 아무개 부사장이 자살했다. 우리 고장에서도 엊그제 지역의 대기업체의 중견 간부로 근무했던 사람이 자가용을 몰고 저수지로 돌진해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을 슬프게 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귀하다.
그 귀중한 생명을 왜 자기 손으로 끊어야만 했을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 사람은 생의 방도에 대한 절망 때문에 살아갈 용기를 잃고 자살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 예를 든 두 사람과 같은 경우는 생활고가 원인은 아니다.  그들은 다 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남들이 모두 선망하는 대기업체에서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부하로 거느리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있던 엘리트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자기 생명을 마감했다. 왜?

나는 그 원인을 학문적으로 깊이 천착할 위치에 있지 않아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상식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그들은 살아오면서 성실하게 산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 타인의 옷을 입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즉, 자신의 이상이 아니고 타인의 이상을 자기 것 인양 착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다. 공직이나 큰 업체에 취직하면 일단은 성공한 인생의 첫발을 내딛었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삶에 긍지와 자신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직장생활이란 것이 결코 화초밭 구경거리는 아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과중한 업무에다 사다리조직의 층계를 오르기 위한 치열한 경쟁,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피 말리는 일상이 펼쳐진다. 제3자의 눈에는 행복하게 비칠지라도 본인들은 전전긍긍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 조직인간들의 빨가벗은 알몸이다.

그래서 직장인의 다수가 스트레스로 괴롭다. 그것을 이기지 못하다가 우울증에 걸린다. 혹자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말한다. 우울증과 감기는 유사한 점이 많다. 한 평생 한 번도 감기나 우울증에 걸려 본 일이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연례행사처럼 감기나 우울증에 시달린다. 또한 감기와 우울증은 어느 것이나 가볍게 여기다가는 죽음에 이룰 수 있다는 점도 닮았다.

연초부터 ‘우울한’ 화두를 던져서 민망하나, 우리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눈 감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냉정히 성찰해 보자는 뜻이니 용서를 바란다. 요는 자살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걸렸다면 그것을 극복하여야 하는데, 묘법은 없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 곧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사람과 비관적이며 소극적인 사람으로 나눈다면 우울증에 잘 걸리는 사람은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쪽이 많을 것이다. 성격을 고치면 좋을 것인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이다.

세상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사람의 일생도 탄탄대로를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희비쌍곡선, 행과 불행의 교차로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그러나 폭풍우가 내리치다가도  활짝 개인 푸른 하늘을 보게 된다. 쨍하고 볕들 날이 온다지 않는가.

끝으로 마음에 삭일 것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충실하고 내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옷을 걸치지 말라는 것과 새해의 덕담처럼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살면 그 복이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지혜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