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국가 유공자 예우 해야
참전용사, 국가 유공자 예우 해야
  • 박주식
  • 승인 2010.06.28 09:19
  • 호수 3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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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사람들-장영철 6.25참전용사 유공자회 부회장

“죽을 고생을 해서 나라를 지켰는데 국가 유공자란 표시만 했지 아무런 예우가 없어.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제대로 대접이나 한 번 받고 죽고 싶어요”

올해나이 81세의 장영철 6.25참전용사 유공자회 부회장은 “우리시가 다른 지자체에 비해 살림이 처지는 것도 아닌데 참전용사 수당은 절반도 안 된다”며 “적어도 다른 시군 만큼 받는 것과 정부가 국가 유공자 차원에서 예우를 해주길”소원했다. 오는 7월이면 참전용사 유공자회장으로 취임하는 그는 이 같은 참전용사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봉사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

“참전용사 권익회복 위해봉사할 것”

장영철 부회장은 우리 민족의 비극 6.25를 하나도 빠짐없이 온몸으로 겪어낸 산증인이자 국가 유공자다. 광양우체국에 근무하던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50년 봄. 당시 26세의 그는 몇 차례 징집요구를 연기시켰으나 결국 스스로 자원해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던 중 6.25가 발발했다. 훈련을 마친 그가 배치된 곳은 강원도 관성. 전선에 배치되기 위해 속초에 내리니 이미 전쟁이 한창이다. 멀리 내륙의 산등성이엔 포탄이 떨어지고 화염이 피어났다.

함께 간 5천여 명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모래밭에 엎드려 두려워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이 하루살이 놈들아 고개 들어”라는 인솔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드니 앞으로 나오란다. 그렇게 뽑힌 그는 학력과 필적 조사를 거쳐 12사단 작전처로 재 배치됐다. 전쟁의 포화를 뒤로 하고 사단 작전처에서 문서 수발을 담당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안주하지 않고 우연히 보게 된 헌병학교 차출 공문에 따라 헌병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리고 영천에 있는 헌병학교에서 엄한 군기 속에 4주간 훈련을 받고 새롭게 배치를 받은 곳이 마산에 있는 101헌병대. 그는 이곳에서 5개월을 근무했다. 그리고 다시 옮겨간 곳이 136헌병대. 그곳은 반공포로 수용소였다. 당시 포로수용소엔 반공포로와 악성포로를 함께 수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섞어 놓음에 따라 반공포로가 수용소 내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죽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 광주ㆍ마산ㆍ부산ㆍ영천ㆍ논산 등지에 반공포로만 따로 수용하게 된 것. 6.25 전쟁은 이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그를 향해 미소 짓던 행운의 여신은 그 웃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에게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953년 6월 18일 24시, 그는 3만 6천여 명의 반공 포로들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는 ‘반공포로 석방’이란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수용소로 들어오는 고압선을 절단해 전기를 차단하는 임무. 입대 전 체신부(우체국)에 있었다는 이유에서 차출 됐다. 반공포로 석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그는 지역 전기업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정해진 시간에 고압선을 절단해 반공포로의 도망을 도왔다.

이미 사전에 반공포로들과 석방에 대해 모의하고 교육을 시켰기에 수용소가 암흑이 됨과 동시에 포로들은 모두가 살길을 찾아 내 달렸다.
하지만 포로들을 함께 관리하고 있던 미군은 이를 용납치 않았다. 이미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포로 석방은 제네바협정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자주국방·안보의식 강화 돼야”

미군은 암흑 속에서도 기관포를 쏘아댔고 포로 20여명이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숨졌다. 또 미군은 끊긴 전기를 어느새 복구하고 탈출하는 포로들의 제압에 나섰다.
그때 대대장으로부터 그와 동료들에게 명령이 하달 됐다. “불을 밝히는 전구를 쏴라!” 모두가 권총을 꺼내들고 전구를 깨트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반공포로의 석방을 도왔다.

날이 밝자 미군의 문책이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은 헌병대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니 내게 죄를 물으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일이 일단락 됐다. 원대 복귀 명령에 따라 다시 부대로 복귀한 그가 이동한 곳은 강원도 대성산. 6.25때 김일성이 대성산 빼앗긴 게 억울해서 3일 밤낮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해지는 그곳이다.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남북이 치열한 접전이 거듭되고 있는 정점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던 어느 날. 그가 속한 부대는 시꺼멓게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했지만 역부족. 겨우 목숨을 부지하니 어느 지점으로 후퇴하라는 무전이 왔다. 생존자들은 5명씩 조를 나눠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으니 부상당한 전우들이 같이 가자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선 것.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눈물을 머금고 이들을 뿌리치고 탈출을 감행했지만 사방에 적군이다 보니 어느 한 방향으로도 나아갈 곳이 없었다.

적군을 피해 이곳저곳을 헤매다 겨우 몸을 숨긴 곳이 인가가 있었던 듯 싶은 곳의 쑥대밭.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쑥대밭에 다다른 이들은 그곳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구원의 손길은 그들을 찾지 않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사흘을 버티자니 그 고통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가 탈진해 사주경계도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때 어디선가 우르릉 우르릉 탁한 기계소리가 들여왔다. 문득 눈을 뜨고 살며시 고개를 내미니 성조기를 단 미군 탱크가 다가오고 있었다. 구세주가 온 것이다.

그렇게 구원받은 그들은 부대로 복귀했고, 그곳엔 3천명의 부대원 중 겨우 7백여 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부대를 재정비한 그들은 다시 전선으로 투입됐고 그렇게 공방을 거듭하다 마침내 휴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는 휴전 2달 후 의가사제대를 했다.
벌써 60여 년 전의 일이다. 제대를 한 그는 우체국에 다시 들어가 광주, 여수 순천 등지에서 32년을 더 근무하고 정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광양 5일장에서 약재 건재상인 ‘한성당’을 20여 년째 해오고 있다.

목숨으로 지켜낸 민주주의, 국가 발전의 초석 

장영철 부회장은 그 고생을 했음에도 국가의 예우가 너무 부족 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그는 “대성산 전투에서 훈장을 받고도 남을 공적을 이뤘음에도 사단본부가 전투를 지휘하지 않고 연대단위로 전투를 하다 보니 상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우리보다 고생을 덜 한 사람도 부상을 입었거나 수훈을 받아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고생한 보람도 못 찾고 있으니 억울함이 많다”고 한다.

또 “그동안 유공자 명예회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 왔지만 유공자란 명칭만 얻었을 뿐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며 “남은 인생 6.25참전용사 유공자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참전용사의 권익회복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장 부회장은 세월이 흘러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안보의식이 많이 약화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 부회장은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미국만 믿고 준비가 소홀한 것이 문제”라며 “또다시 6.25와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모든 국민이 나라를 우선 생각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6.25때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됐을 거란 철없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이는 나라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수호했기에 이만큼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무리 큰 발전을 이뤄도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이 황폐화 된다”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안보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현재 우리지역엔 388명의 참전 유공자가 있다. 나라와 겨레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던 그들의 숭고한 정성이 제대로 평가받고 조국의 수호자로 예우되길 기대한다.
                         
박주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