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열풍에 대한 斷想
<도가니> 열풍에 대한 斷想
  • 광양뉴스
  • 승인 2011.10.10 09:57
  • 호수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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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흥남 한려대 교수

가을 들녘은 황금색으로 출렁인다. 수확의 계절임을 실감하는 즈음이다. 텅 빈 황량한 겨울 들판에 비하면 마음도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계절의 순환에서 오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우리네 사회와 삶이 넉넉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도가니> 열풍에 대한 이러저런 생각의 뒤 언저리에서 스미는 마음이다. <도가니> 열풍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지만, 동시에 돈과 권력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채 아직도 굳건하게 유지되는 성(城)들이 잔존하고 있는 건 되짚어지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을 원작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가 도화선이 되어 <도가니> 열풍이 쉽게 사그라질 줄 모른다. 영화 관람객 수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이미 손익 분기점을 넘어선 상태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소설 <도가니>와 작가 공지영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소설 <도가니>와 작가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힘, 나아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져 온 인권유린의 실태와 은폐를 소설을 통해 고발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촉발케 한 점에서 반갑다. 공감의 확산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불편한 진실’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공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2년 전 소설이 출간될 당시보다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그 관심이 증폭된 점이 있지만, 매체의 차이나 관심의 전후관계가 중요한 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은 소설 원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소설을 읽고 난 독자들은 영화를 보고 싶은 욕구도 생기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러한 관심을 통해서 공감이 확산되고, 관심이 지속됨으로써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견인(牽引)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순기능을 발휘해 사회적 약자가 더 이상 음지에서 억울해하거나 인간으로서 자존감에 상처를 받지 않는 사회를 잉태하는 초석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좀 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건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도가니> 열풍의 진원지는 젊은 세대들이다. 주목할 점이 있다. 이러한 관심이 설령 돈과 권력으로 유착된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 혹은 분노감이 있을지라도 그 분노감은 장차  더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내장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감은 응징만 수반하지 않는다. 제대로 응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회를 도래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때 개선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심으로 이어져 좀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축과도 연계될 것이다.

공지영은 필자와 비슷하게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작가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다를지라도 동일 세대로서 분노감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한 경우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불쑥 불쑥 엄습해 오는 분노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기득권에 대한 반항과 무력감의 교차에서 오는 서글픔, 인간의 야누스적인 측면에서 오는 허탈함과 허무의 감정들과 불안감이 자리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 때의 분노감과 관련된 기억들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공지영의 초기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도 적절하게 비유하듯이, 척박한 땅에 뿌린 열무 싹도 먹다 남은 차 찌꺼기를 모은 것을 흙에 뿌려주면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처럼, 거대한 댐을 폭파시킨 것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이 아니라 구멍 낸 자리에 물이 스며들고, 댐은 결국 구멍 난 틈으로 스며드는 강의 물줄기가 무너뜨린 것처럼, 지속적인 관심과 공감의 확산이 누적된 결과물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된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우리 사회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내세울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품격 있는 사회,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는 막연한 정서에 의해 형성되기보다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외침과 불굴의 의지에 의해 가능해진다.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이런 사례는 셀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막연한 낙관이나 낙관주의자는 위험한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