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의 반성
세밑의 반성
  • 광양뉴스
  • 승인 2011.12.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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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흥남한려대 교수
매년 이맘때면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곤 한다. 교수들의 설문을 통해 수렴된 것으로 한해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의미를 갖는다.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즈음에 널리 회자되곤 한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 말의 표면적 의미는 ‘자기만 듣지 않으면 남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일컬을 때 쓰인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해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가 문객들을 동원해 만든 ‘여씨춘추’의 유래를 들지 않아도 이 말의 속뜻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통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은 낮은 자세와 겸허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특히 지도자가 민심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낮은 자세로 두루 소통하려는 실천력의 겸비 여부는 국가의 장래를 좌우할 수도 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름의 성찰의 시간이 요구된다. 필자도 올 한 해를 돌아보니 아쉽고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혹자는 말한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을 남발하지 말자고. ‘자기 스스로를 진정 감동시켰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만큼 막연한 자기합리화나 타성적인 반성에 대한 경계(警戒)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 시사적이다. 보통 사람들 대부분 정말 성실하고 치열한 삶을 영위해 간다. 나 자신을 위해, 혹은 내 가족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다. 이제 또 다른 새 해를 맞는 세밑에서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새해는 ‘아직 뜯어보지 않은 선물’이다. 

모두(冒頭)의 사자성어에 담겨진 교훈처럼, 먼저 소통의 증대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왔던가 돌아보게 된다. 말로만 ‘열린 사고’를 주창하거나 혹은 교직사회의 관성이 몸에 밴 탓으로 내 말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지나 않았는지. 정치인들은 흔히 ‘정치는 생물이다’며 정치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에둘러 표현하듯이, 우리 사회 또한 복잡하고 상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감한 현장이건만 두루뭉술한 교설(敎說)이나 치열성이 부족한 현상적 진단에 머문 경우는 없었는지 반성해 본다.

돌아보니 반성할 것들이 너무 많다. 기득권이라고는 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이지만 이기적인 잣대로 판단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던지. 말로 인한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도 않는다던데. 그물코처럼 엉켜 있는 민감한 문제를 대면할 경우 이율배반적인 잣대로 내 주변을 힘들게 한 점은 없었는지도 오버랩되는 요즈음이다. 장차 우리 젊은이들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하건만 알량한(?)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면서 현실에 안주려는 하려 했던 점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리의 미래는 젊은 세대의 역동성과 기상세대의 연륜과 지혜가 균형을 이뤄 나갈 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건 불문가지다.

감사와 배려의 마음을 갖고 올 한해를 살아왔던가를 돌아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받은 것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인문학을 공부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덜 스트레스 받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지 조금씩 깨달으며 산다는 점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경우가 많고, 또 독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구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찾아간 경우가 많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개인적 기질 탓도 있지만, 비교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막연한 낙관주의는 권장하고 싶지 않지만 낙관과 긍정의 힘은 막강하다. 녹록치 않은 현실에 가위눌려 기(氣)를 세우며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지역사회의 여러분들이 이런 때일수록 각기 삶의 현장에서 담대한 가슴으로 희망의 불씨를 당겼으면 한다. 갈무리 하려니 요절한 서양의 배우 제임스 딘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