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도리
인간의 도리
  • 광양뉴스
  • 승인 2012.04.1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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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중마보건지소 사무장
나는 인간의 도리(道理)를 가끔 한 번씩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도리란 국어 사전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 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염된 현대를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건강한 사회를 지탱함은 법이나 어떤 물질보다는 효(孝)와 예(禮)에 있다 할 것이며 효는 인륜행실의 근본으로서 도리의 첫걸음이다 할 것이다. 

누가 은하주 이후 효라는 도리를 다한 자가 있을까마는 나는 저 18세기 영조대왕과 정조대왕이 효를 향한 도리를 살펴본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어떻게 보면 효와 예란 도리를 다하여 그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영조대왕 사친(어머니)은 일찍이 일곱 살의 나이로 궁궐에 들어와 궁녀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나인(무수리)이 훗날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빈에 오르며 자신이 모셨던 인현황후 민씨가 폐서인 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난날 중전의 자애로움을 잊지 못해 상기하다가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다.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년)에 49세의 나이로 영조가 즉위하기 6년 전에 별세한다.
어머니의 불행한 신분을 잊지 못한 그는 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극진한 효행과 추숭으로 극복하고자 가진 노력을 다했다.

그 뒤 영조즉위 10년(1734) 2월에 비로소 빈의 고비(빈의 부모)를 추증하고 즉위20년(1744)3개월 후 묘호(廟號)를 육상으로 묘호(墓號)를 소령으로 올린 뒤 묘갈에 이런 글을 새겼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붓을 잡고 글을 쓸려고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 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느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라는 가슴 저미는 비문과 함께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육상궁과 소령원에 친행(몸소실행)을 함에 있어 육상궁 총232회 소령원 총17회를 친행(親行)하였다.

정조대왕은 1752(영조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궁 홍씨사이에 둘째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왕세손으로 동궁에 지위를 유지 1764년 영조(40년)는 세손인 정조를 자신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켜 종통을 이었다.

정조는 어린나이에 14년 동안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행세하다가 즉위 당일 조회에서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리하여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묘를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수은묘 (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리고 사당인 수은묘(廟)는 경모궁(敬慕宮)으로 올렸다.

그 이후 정조13년(1789)에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다는 수원(현재 화성)의 화산으로 묘를 옮긴 후 현릉원(顯陵園)으로 이름을 바뀐다.

승하한 그해 정월 정조는 현릉원에 가서 땅을 치면서 목메어 울었다. 신하들이 진정하라고 청하자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 크나큰 아픔이 복받쳐 올라서 그러는데 어찌 차마 나더러 진정 하란 말인가” 라고 했다.

사도세자의 손자가 세자로 책봉되고 가례를 올린 경사에,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니 아픔이 복받쳐 올랐다는 말이다.

이러한 정조는 수시로 능을 찾아오며 자주 왕래할 적엔 월 20회까지 친행을 하며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위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영조는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思母)인 효의 도리가 왕으로서의 뿐만이 아니라 만백성의 표상이 되었다.

반면 정조는 영조와 달리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젊은 나이에 비명으로 간 것을 가엾게 여겨 사부(思父)인 효심이 충만한 것을 볼때 이 두 대 왕이 보여준  효심의 도리란 날로 황폐화되어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하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