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갑시다. 물 따러…”(하)
“산에 갑시다. 물 따러…”(하)
  • 귀여운짱구
  • 승인 2008.03.20 09:06
  • 호수 2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번은 너무 힘들어하는 남편 몰래 산에 갔다가 그야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물통을 들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돌아다니려니 팔다리가 아프고,이미 물을 받은 나무인 걸 모르고 또 산을 기어올라갔다가 헛걸음하면 약이 오르고, 밤송이에 찔리면 허술한 신발 신고온 나 자신한테 화가 나고, 물을 받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물이 통 밖으로 나가면 속이 상하고…정말 기분이 뒤죽박죽,비맞은 누구마냥 혼자서 중얼중얼…그러다가 손님들로 가게가 바쁘다는 전화에 부랴부랴 내려오려니 비닐속에 차 있는 물들이 눈에 밟힌다. 어쨌거나 나 혼자 받은 고로쇠 약수 두 통을 들고 하산하는 기쁨이란…

“아 이사람아,이게 얼마나 힘든데 혼자 거길 가” 칭찬보다는 핀잔을 먼저 하는 남편이지만 하나도 섭섭하지않다. 그 속에는 애썼네, 하는 말이 숨어있음을 내 익히 아는 바이니까. 산에 가자고 내가 큰소리 친 그날, 우린 친구가 됐다. 헥헥거리며 산을 오르는 내게 손을 내밀어도 주고, 우리산 경계에 대해 다시 설명도 해주고, 봄이면 수확할 두릅이며 매실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아하, 산에 오르니 남편 얼굴에 꽃이 피네. 아래에서는 서로 일만 하느라 남편 얼굴빛이 어떤지 알지도 못했는데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니 산오르는 일이 자주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간에도 간혹, 남편에게 산은 휴식처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산에만 다녀오면 산풍경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더 부지런해야겠다며 다짐하는 모양이 꼭 소년같았다.

그동안 내가 물을 받던 장소보다 훨씬 높이 올라갔는데 남편은, 자기는 더 올라가야 하니 나는 그곳에서부터 내려가면서 물을 받으란다. 물통이 차면 산허리쯤에 있는 고무통에 물을 부어넣고 계속 내려가면서 물을 받으란다. 가파른 산을 맨몸도 아니고 배낭을 멘 것도 아니고 흔들리는 물통을 들고 내려가보라. 돌이나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으려 중심잡다보면 종아리에 힘도 들어가지, 어깨무게는 더해지지…그래도 비닐봉지에 물이 차있는 것을 보면 또 긴장했던 마음이 스스르 녹아내린다.
물이 별로 없는 나무한테는 없는 물 빼앗아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 물이 많은 나무한테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중얼거린다.

여기저기 비닐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비슷비슷해서 저 나무에서 물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를 몰라 몇 번 헛걸음하다,내년에는 빨간색,파란색 띠를 잔뜩 만들어서 물받은 나무에다 오늘은 빨간띠로 매며 다니고 다음에는 파란띠로 매며 다니면 되겠다 싶은 생각에 혼자 기특해한다.
후다닥 날아가는 새들 때문에 간이 몇 번씩 떨어지기도 하고 초롱초롱한 그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면 또 얼마나 행복한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숨을 쉬기도 하고 부신 햇살에 눈을 감기도 한다. 아, 다른 하는 일없이 산에서 산하고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면서도 순간,꿈을 꾸는 것이다. 금세 깨어날 꿈…시골생활이 달콤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옛날, ‘여성살롱, 임국희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산더미같이 쌓이는 편지들이 날 일찍 철들게 했다. 스물세네살 처녀가 이미 시집살이나 고부간의 갈등에 대해 강의를 하라해도 할 만큼 고수가 됐고, 아이를 기른 적이 없어도 유아동교육이나 심리에 대해 선생님처럼 말할 수도 있었고, 전원생활을 드라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 감상적이 되는 도시주부에게 일침을 가하는 화난 시골아낙을 벌써 20 여년 전에 만난 것이다.

삶이 다 그렇지만 특히 시골생활이라는 게 맘 같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난 그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귀농결정이 쉽지않았다. 하지만 꿈을 이루고자 간절히 소망하는 남편에게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나의 편안함은 고사하고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두 번째였다. 평소 '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나는 남편의 건재함이 늘 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미련을 버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광양에 내려온 지 어느새 1년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힘든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들이 더 많이 기억된다. 이방인의 서툰 시골살이를 동네사람들은 이해하며 도와주고, 아낌없이 응원해주고 믿어준다.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또한 다 즐겁고 다정해서 좋은 친구가 된다. 날이 갈수록 이 곳 광양이 편해지는 만큼 앞으로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을 믿는다.
이제 고로쇠나무에서 작은 호스를 떼어내고 나무구멍에 약 바르는 작업을 해야한다며 채비하는 남편의 마음은, 어느새 산에 가 있다.